2009년 기축년의 새해가 밝았다. 2000년대의 도래를 환영하며 ‘밀레니엄 시대’라는 말을 운운하던 때가 엊그저께 같다. 지구가 멸망하니 어쩌느니 하며 갖은 의심과 더불어 수많은 밀레니엄둥이의 탄생이 보여주듯 우려와 희망을 동시에 품고 시작한 2000년대. 2000년 하고도 어느 새 9년이나 보태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우
또 하나의 ‘우리학생회’가 탄생했다. 몇 년 째 ‘우리학생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학생회’에 대해 잘 몰랐을 때, ‘왜 작년에도 ‘우리학생회’고 올해도 ‘우리학생회’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우리학생회&
당신은 ‘지식인’과 ‘지식IN’ 둘 중 어느 집단에 속하는가? 포털 사이트 네이버 ‘지식IN’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대체로 ‘지식IN’에는 넓고 얇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 정보는 때로는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쓸모없기
‘세’가지 ‘새’를 생각한다. 가을이 온 지도 모르게 가버렸다. ‘어느새’.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노을이 지고, 그 사이로 ‘새’가 날고, 하늘하늘 ‘억새’는 찬 바람에 눕는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새’는 어느‘새
청년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며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있었다. 그런데 농사를 한 평생 업으로 삼고 살아왔던 청년의 아버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청년에게는 하늘의 배신이었다. 청년은 아버지가 한 평생 일군 땅을 책임져야 했다. 땅을 섬기는 것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는 일이었다. 젊은 나이에 시골로 돌아왔다. 사랑했던 그녀는 그 청년을 떠났다. 청
요즘엔 못 믿을 말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오빠 못 믿니?’ 따위의 거짓말은 거짓말 축에도 못 낀다. ‘서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도, ‘나는 그런 돈 받은 적 없다’는 말도 이제는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의 차원을 넘어선 관용어가 되어버렸다. (이 때 ‘관용&r
기사 마감만 아니었으면! 나도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한 손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고, 연인과 한가로이 용지에서 보트를 타고 싶었다. 무대 위로 올라가버릴 듯한 포즈로 ‘손 한 번만 잡아 달라’며 이승환에게 애걸복걸 하고도 싶었다. 주막에서 파전에 막걸리도 먹고 싶었다.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축제를 즐긴다&r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은희경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읽다 섬뜩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글을 신나게 읽어내려 가는데, 주인공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던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비대한 몸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다 서른 즈음에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이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떠나간 그 이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처럼 말할 수 있을까. 1년에 몇 번 씩은 화두가 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죽게 하는 것. 인터넷에 ‘자살’을 치면 뭐가 나올까. ‘생명은 소중합니다.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내 무의식 속 한 구석에는 태양보다 더 밝은 듯한 하얀 달빛이 내리쬐는 어느 시골 밤, 양 옆에 있는 친구 둘의 손을 꼭 잡고 빙빙 돌며 ‘강~강~수월~래’를 신나게 외치던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눈부시도록 내리쬐는 은색 달빛에 감사하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두 친구의 손을 꼭 잡으며,
그대는 이번 여름, 별 하나 별 둘을 헤아려 보았는가? 어학연수, 해외 배낭여행, 해외 봉사활동, 해외 인턴십 등 부푼 꿈을 안고 세계로 나간 그대들! ‘그곳’에 간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진정 얻어온 것은 무엇인가?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물어왔다. ‘왜 해외로 어학연수를 가려고 하는데?’ 내게는 ‘골
내 생에 이런 날이 안 올 줄 알았다. 또, 오지 않았으면 했다. 어느새 나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금남로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촛불이다. 나는 1백만 개 촛불 중 일개 촛불에 불과하다. 뜨겁다. 자꾸만 흘러내린다. 내 몸을 태워서라도 이 나라를 바꿀 수만 있다면. 더 붉게, 더 뜨겁게 달아오르자. 영차영차! 나를 들고 있는 이 사람, 평범한
나는 숫자를 경멸한다. 특히나 ‘1’이라는 숫자를 경멸한다. 어렸을 때는 철이 없어 ‘1’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1’에 부단히도 집착했다. 1등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1등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1’은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전남대학교가 1등
신문 ‘만들기’와 ‘신문’ 만들기 사이 가끔 나는 내가 ‘학생 편집장’인지, ‘편집장 학생’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 둘은 단어의 위치만 바꿨을 뿐인데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보통은 ‘편집장 학생’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더 많다. 내게는 항상 <
며칠 전, 서울에 다녀왔다. 내가 본 서울의 풍경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서울시청 광장과 광화문, 청계천 주변을 몇 바퀴나 돌며 본 풍경은 ‘소통의 풍경’이었다. 나는 서울을 자주 가는 편이다. 올해만도 벌써 여섯 번째 정도는 될 것이다. 그 때마다 ‘서울 사람들은 너무 여유가 없어’, ‘빡빡해&rsqu
5월 18일을 둘러싸고 전남대와 광주가 시끌시끌하다. 이 ‘시끄러움’이 5·18에게 그저 ‘소음’일까, 아니면 ‘팡파레’일까. 작년부터 우리가 너무 5·18을 ‘써먹지’는 않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5·18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서 5
내 친구들 중에 내가 정말 아끼는 중국인 친구 셋이 있다. 전남대에 다니는 대학원생 친구 하나, 학부생 친구 하나, 그리고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하나, 이렇게 셋이다. 그 셋은 또 친구여서 나까지 넷이 서로 친구다. 지난 토요일,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가 광주에 놀러왔다. 그 친구가 백화점에서 살 것이 있다고 해서 함께 백화점에 갔다. 내
범인을 잡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CC-TV였다. 나는 지금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 당신도 지금 ‘어떤 기계’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 섬뜩하다. ‘어디야?, 뭐해?’하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조차 감시로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어디야?, 뭐해?’하는 문자 메시
당신의 소통구는 무엇입니까. 나는 요즘사람들이 많이 하는 네이트온도, MSN 메신저도 잘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문자를 많이 보내는 것도, 전화 통화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난 내 자신과의 소통만 할 뿐 타인과의 소통은 그 길을 열어 놓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문득 내가 일방향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를 뽑아 주신다면 여러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학급 임원을 했었다. (참고로 그 때는 학기별로 임원을 따로 뽑는 데다 한 학기에 6명의 임원을 뽑았다) 그 때도 그렇게 영악한 아이들이 있었다. 먹을 것에 약한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줘가며 지지자(?)들을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