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스릴러다. 녀석은 나도 모르는 새에 잔잔한 파동으로 나의 몸과 그 안에 든 정신을 서로 분리했다.어느 날 세영 언니가 소개해 준 의사를 찾아갔다.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병명은 말해주지 않고, 작은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일기를 써보세요. 내용과 분량은 상관없습니다. 그저 내가 이것을 왜 노트에 남겼는가. 그것만 생각하세요. 그게 이 일기장에 얽힌 유일한 법칙입니다.”글을 쓰지 못하겠다고 찾아온 환자에게 일기를 쓰라니. 잔인하지만, 세상은 원래 그렇지 않은가. 매일 출근하듯 들락거
내 연인의 마지막 말은 “도영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고 바보같이 죽어버린 내 불쌍한 남자는 서울 근교 선산에 얌전히 누워있다. 나를 싫어한다던 연인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자 나에게 달려와 물었다.“찬경이는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니?”고개를 끄덕이고, 장례가 치러지고, 그가 옮겨지고, 흙이 그 아이 위로 툭툭 떨어졌다. 시간은 묵묵히 그의 공간을 채웠다. 그날 분 바람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가 그 바람이 다가오면 못내 울음 지었다.요즘 연기를 극단 가서 배우는 사람은 없다. 걸레질로 보낸 세월이 타오르는
또 그 이름. 오랜만에 본 친구 얼굴이 미워진다. 그래도 이것만큼 우리를 아우르는 것은 없었다. 그것이 우리를 아우르는 불편한 진실이었다.동명의 방은 3층에 위치했다. 방은 넓지 않았지만 넓은 창이 답답함을 조금 덜어주었다. 나는 창을 열고, 대기하던 바람을 우수수 맞아버렸다. 동명은 코트를 벗어 걸이에 걸곤,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맥주였다.“한 잔 마셔.”취이익. 거품이 쏟아진다. 한 모금 마시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열어놓은 창이 톡톡 떨렸다. 나한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은 동명은 불현듯 이야기를
극장 로비 바닥에서 높지 않은 천장으로 뻗은 기둥의 개수를 세었다. 그늘에서 모습을 감추던 기둥에 시선이 이를 때쯤 한 남자가 가방을 고쳐 매며 다가왔다. 느려터진 남자의 걸음을 기다려 그와 마주하고, 생각했다. 이 얼굴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구나. "오랜만이야. 안 본 새 꾀죄죄해졌네. 흐흐흐."마땅히 떠오르고 있어야 할 것을 알아챈 순간은 꽤나 감격스럽다. 그가 실실거리며 걸음을 질질 끌어댄다. 우리는 유리문을 열고 바람 섞인 찬 공기를 맞았다."이제 브로드웨이만 가면 되겠다."내 말에 그는 수줍게 웃었다. 한동안 땅만 보며
그날 탔던 열차의 공기가 떠오른다. 바다는 GIF 파일처럼 반복되며 창틀에 껴 있었다. 콧잔등까지 올라오는 목도리가 내 목을 감쌌다. 그 사람 어깨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파묻었다. 기름진 코코넛 냄새가 났다.코카이(後悔) 역에서 떨어지듯 나 있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러 가게를 마주치게 된다. 끼니를 때우는 밥집이 대부분이지만, 중간중간 비디오 가게나 레코드 상점을 볼 수 있다. 그 빈도가 조금씩 늘다가 문득, 다른 상권으로 넘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자그마한 극장에 다다른다. 입구 양옆으로 붙어 있는 큼지막한 포스터가 눈에
사랑하기 전까지는 쓸 수 없다.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쓰기 위해 사랑한다.엄마는 속초 겨울 바다를 걸었다. 바다였다가, 바다가 아니었다가, 바다인 곳을 걷는다. 파도가 운다. 얼은 줄 알았던 바다가 출렁거린다. 속초 바다는 얼지 않는다.또 이곳에 왔네. 나는 자조하듯 말한다. 엄마의 겨울용 부츠에 바닷물이 닿는다. 바다와 모래사장이 만나는 하나의 선을 엄마는 본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본다. 차가워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지만, 그 순간에도 무언가는 움직이고 있다. 엄마는 선을 따라 경계를 횡단하다 나를 올려봤다. 나는 제방
문득 소녀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소미’는 이제 없다. 소녀는 올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 역경을 헤쳐가야 한다.‘스스로 역경을 헤쳐가야 한다.’ 당신은 과제에 마침표를 찍는다. 교양필수인 ‘성찰과소통의글쓰기’ 수업에서의 ‘1년 전의 자신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이라는 주제의 자유 글쓰기 과제를 모두 작성한 것이다. 2023년 1년간의 대학생활을 하며 당신이 했던 고민들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탐구의 취지였다. 아직 어리고 열정만 넘치
과제가 하나둘 공지되는 과제의 계절. 당신은 중간고사 후 제출해야 할 과제를 미리 해두기로 한다. 과제 내용은 ‘가상의 보고서 쓰기’ ‘5쪽 내외, 10pt, 바탕체’ 공지된 조건까지 꼼꼼히 확인한 당신은 어떤 내용을 도입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최근 토익시험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한다.당신은 2주 전 토익시험을 보았다. 장학금을 받기 위한 요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시험 일주일 전에 모의평가 문제들을 세 번 정도 풀어본 당신은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되뇌며 시험장에 들어갔다. LC부터 시작되는 문제들을 풀어가는데, 뒷자리에 앉
오늘 수업의 토론 주제는 ‘교양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이다. 1차 토의가 시작된다. 학생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의견을 내기 시작한다. 공대생이 발표한다. “교양의 주축은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성 역시 교양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성도 선과 악을 구별하는 학문적 지식에서부터 파생됩니다….”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진행하기로 한 독서클럽의 첫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보마루 1층 그룹스터디룸 앞의 라운지에서 클럽원들을 기다린다. 5분쯤 기다리자 소녀가 도착한다.다시 5분이 흐르고 한 사람이 더 도착한다.
소란스럽던 수강신청 기간이 끝나고 당신이 학교에 갈 시기가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학교는 울긋불긋하게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까치들의 모습과 구석의 나무 위에 둥지를 짓는 비둘기들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번 학기 당신이 수강한 수업들은 모두 8과목. 성적우수자에 해당되어 수강가능한 최대 학점을 듣는 당신이다. 최근 여러 학과들에 조금씩 관심이 생긴 당신은 그 과목들의 교양이나 저학년 전공을 한 번 들어보려는 계획이다. 방학에 복수전공이나 부전공 선발 공고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다.지금
“하아.” 온라인 멘토링 수업을 1시간 전부터 준비하는 당신은 멘티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멘티를 수업하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자각했기에 스스로 실망감을 느낀다. 초심을 잃었음일까. 잠시 첫 수업을 생각한다.“안녕하세요~ 멘토 쌤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난 소녀의 조언대로 다양한 활동을 도전하다 끝내 합격한 대외활동인 온라인 멘토 활동. 당신은 면접의 떨림을 생생히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대답하는 멘티를 보는 당신의 눈에 웃음이 가득하다. “오늘은 오리엔테이션
5월, 모든 생명이 가장 푸르르게 번창하는 시기. 당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캠퍼스를 걷다가 봉지에 펼쳐진 흰 천막을 보고 다가간다. 이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던 곳에 하나의 건물이 나타났으니 호기심이 생길 만하다. 천막을 젖혀 들어가니 내부는 아무도 없이 사진과 향이 놓여있다. “5·18 추모 분향소라….” 당신은 생각에 잠긴다. 그래, 가는 거라고.‘전일빌딩245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전일빌딩 앞에 서 있는 당신이 들어서자 직원이 안내 책자를 보여준다. “총 10층으로 구성되어있고, 5, 6, 7층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멘토링, 과외, 대외활동….” 소녀와 헤어진 당신은 조언을 곱씹는다. 그러다 운영 중인 한 부스를 발견한다. ‘2023 신문방송사 수습 모집’, 부스의 사방팔방에 포스터가 붙어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Chonnam Tribune이고 이쪽은 전대방송이에요. 체험하고 가세요!” 편집국원의 소리에 당신이 다가간다. 잡지와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행사 참여를 마친 당신의 손에는 사탕 3개가 들려있다. 당신은 자취방으로 돌아간다.‘전대신문 수습기자(국원) 지원서’ ‘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면접 공지일, 당신의 휴대전화가 메시지가 왔다며 알
‘안녕하세요! 2023학년도 학생회를 모집합니다!’, ‘4월 4~5일 단과대 MT를 진행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사람 많은 건 싫어.” 카톡에 떠오른 알림을 지우며 중얼거리던 당신은 문득 소녀를 떠올린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던 당신은 연락처를 살펴본다. 수능이 끝나고 만든 휴대전화에 등록된 사람은 50명 남짓. 그중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소녀의 연락처. 이름도 몰라 ‘소녀’라고 간략히 저장해 둔 상태다. 우우웅. 갑작스레 울리는 진동음. 당신은 단박에 전화를 받는다. “뭐 해.” 그때와 같은 음과 어조, 소녀다.
민주화의 중심지, 전남대학교! 3년간의 결실은 당신을 꿈에 그리던 전남대학교에 합격하도록 만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취까지 하게 된 당신은 드디어 오늘, 수강신청을 하러 근처 PC방에 방문한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 비집고 들어가 자리한 당신은 서둘러 홈페이지를 켜 하염없이 기다린다. 56, 57, 58! 여기저기에서 들어온 조언에 따라 58초에 마우스를 클릭한 당신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페이지에 당황한다. 그러나 지금 시각은 01초, 당신은 서둘러 다시 클릭한다. 화면이 정지된 듯한 착각이 든다. 당신의 앞에는 무려 2,00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