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탔던 열차의 공기가 떠오른다. 바다는 GIF 파일처럼 반복되며 창틀에 껴 있었다. 콧잔등까지 올라오는 목도리가 내 목을 감쌌다. 그 사람 어깨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파묻었다. 기름진 코코넛 냄새가 났다.

코카이(後悔) 역에서 떨어지듯 나 있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러 가게를 마주치게 된다. 끼니를 때우는 밥집이 대부분이지만, 중간중간 비디오 가게나 레코드 상점을 볼 수 있다. 그 빈도가 조금씩 늘다가 문득, 다른 상권으로 넘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자그마한 극장에 다다른다. 입구 양옆으로 붙어 있는 큼지막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포스터는 고장 전통극을 재해석한 연극이었고, 왼쪽 포스터는 내 잘난 동기의 네 번째 연극이었다. 종종 오던 곳이지만 이젠 통 걸음이 쉽지 않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잔뜩 얼어버린 손바닥으로 차가운 유리문을 밀었다.

잘 알지 못하는 언어들이 들린다. 극장 안엔 차분한 소란스러움이 차오르고,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어두워지는 조명을 배경 삼아 엄마를 떠올렸다. 요즘 시간이 나면 엄마 생각을 한다. 마치 따지듯이 나는 속으로 왜?, 왜? 거린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갑자기 그런 결심을 한 걸까? 왜 하필 연기지? 이상하게도 질문은 답을 내어주기 대신 왼쪽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조명이 꺼지고, 극장이 어두워졌다.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무대 위에서 누군가 말했다.

“언젠가 그루터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고요하던 때. 언제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시간이 흐르며 변형된 시뮬라크르와 어떤 사람만 남아있습니다. 모두에게 그런 것이 하나쯤 있지 않나요? 온전하지 않음에도 쉬이 쥔 손을 펼 수 없게 하는 것들이요. 마음속 빈 잔을 채우려 잠들지 않은 밤을 쏟아붓다 시작된 상념이 이렇게 편지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잘 아시니 더욱 그러시겠네요. 그래도 읽어주시리라 믿고 용기 내어 날려 보냅니다. 파리에서. 수경.”

조명이 켜졌다. 무대가 단번에 밝아지고, 샌드위치를 든 여행객이 공항을 거닌다. 굴러가던 캐리어 바퀴가 공항 벤치 앞에 멈춰 섰다. 여행객은 휴대전화를 들고 말했다.

“일정이 꼬였어. 시간을 잘못 봐 가지구... 응... 반나절 정도? 알겠어. 잘 챙겨 먹을게. 걱정하지 마.”

수경이 휴대전화를 내리자 그녀 뒤로 사람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수경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까먹었다. 샌드위치가 반 정도 남았을 때 한 남자가 수경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은 일제히 “아”하고 소리 냈다. 그리고 무대가 멈췄다. 수경은 고개를 우리에게로 돌렸다.

“사실 시간을 잘못 본 게 아니에요.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서, 한 번 만들어보려고 했거든요. 근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요. 소리 지를 뻔했어요. 현실이 아닐까 봐.”

수경과 남자는 한껏 어색해하며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가 멀어진다. 공간이 나에게로 온다. 나는 어느새 그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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