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며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고 있었다. 그런데 농사를 한 평생 업으로 삼고 살아왔던 청년의 아버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청년에게는 하늘의 배신이었다. 청년은 아버지가 한 평생 일군 땅을 책임져야 했다. 땅을 섬기는 것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는 일이었다. 젊은 나이에 시골로 돌아왔다. 사랑했던 그녀는 그 청년을 떠났다. 청년은 좋았지만 시골은 싫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골은 좋지만 농사가 싫었고 가난이 싫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에게 남은 것은 땅 뿐이었다.
  어느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강진에서 만난 과묵한 어느 젊은 농민의 이야기다. 그는 원래부터 그렇게 과묵했을까? 무엇이 그를 과묵하게 만들었을까?
  농촌은 스산했다. 겨울은 어느 곳보다 그 곳에 가장 먼저 찾아드는 듯 했다. 까악까악 까치는 더 이상 반가운 손님을 데려다 주지 않았고, 황금 들판도 더 이상 황금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우리에게 할 말이 많았다. 그들 중 어느 한 농민은 우리에게 좀처럼 정을 주려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건넨 술잔은 차갑디 차가웠다. 그들은 정치인보다 기자가 더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중앙지 신문 기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농촌에 와서 농민 신문을 한 번 만들어봐야겠다는 젊은이들은 없더라’며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였다. 절박한 그들의 심정을 전해줄 이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햇살, 바람, 물, 공기……-이 조화롭게 작용해야만 꽉 찬 결실을 맺는 농사를 1년 내내 힘겹게 지어도 적자가 나는 현실. ‘이제는 농사 안 지어야지’라고 마음먹고 들판을 떠나도 이내 새 해가 밝으면 다시 들판에 나가는 농민의 마음. 스산한 농촌의 사계를 올곧이 전해줄 이 하나 없었던 것이다.
  농민들이 내게 건넨 술잔은 더욱 더 차갑게만 느껴졌고, 다른 한 손에 쥐어진 펜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강진에서 난 시인 김영랑의 시 ‘내 마음 아실 이’가 왜 그토록 슬프게 떠오르던지……. 물론 그가 농민들의 농심을 생각하며 쓴 시는 아니겠지만, 추수를 끝낸 농민들이 내게 ‘내 마음 아실 이’를 찾아달라며 곡소리를 하는 것 같아 떠올랐던 것 같다.
  내 마음을 아실 이 /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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