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떠나간 그 이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처럼 말할 수 있을까.
  1년에 몇 번 씩은 화두가 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죽게 하는 것. 인터넷에 ‘자살’을 치면 뭐가 나올까. ‘생명은 소중합니다. 어떤 위기에서도, 어떤 역경에서도 지켜내야 합니다’라는 자살예방캠페인 문구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각종 센터들이 뜬다. 그런데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자살’을 인터넷에 쳐 볼 리가 있나. 저런 뻔한 문구 보다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적어 놓는 건 어떨까.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 보기 싫어 떠나기 보다는 아름다웠다고 말 할 수 있을 때, 아름답게 떠날 수 있게 말이다.
무엇이 그들을 떠나가게 했을까. 지난해, 치솟는 등록금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나간 어머니.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해 성적을 비관한 나머지 떠나간 딸. 사채 빚에 눌려 떠나간 그 남자……. 왜 사회는 그들로 하여금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가. 아니, 어쩌면 사회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도 않고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만들어 결국에는 떠나가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 사회는 목숨 건 고공농성을 해야만, 단식농성을 해야만, 분신을 해야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가. ‘생명은 소중하다’면서 생명과 연결된 근본적인 원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가. 그들을 떠나가게 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조정해왔던, ‘돈’과 그 ‘돈’을 생명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아닐까.
  이제는 목숨 걸고 공부하지 않아도,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목숨 걸고 일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