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진실 제대로 바라보고 사죄해야”
“가족에게 받지 못한 인간적인 따뜻함 광주 시민에게 받았다” 감사 거듭 언급
“세상의 정보와 가족이 보여준 거짓된 모습 간 괴리 힘들었다” 고백

당시 희생정신 배우고 학생들의 솔직한 이야기 듣고파 전남대 찾아…“함께 기억해야 비극적 역사의 반복 피할 수 있어”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생존자 한 푸는 데 도움될 수 있다면 자주 광주 오고 싶다”

전우원(27)씨가 5월 18일 전남대를 찾았다. 그는 5·18민주화운동(5·18) 제43주년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에 네 번째 방문했고, 추모식 다음 날 전남대를 둘러보며 학생들을 만났다. 그는 <전대신문>과의 지난 18일 단독 인터뷰에서 “5월 18일에 관심이 있는 학생분들이 여기(전남대) 많을 텐데 그분들의 생각을 여쭤보고 싶었다”며 “과거의 민주화운동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에 어떻게 녹이고 싶은지도 배우고 싶었다”고 우리 대학을 찾은 이유에 대해 말했다.

전우원씨는 고(故) 전두환씨의 둘째 아들 전재용씨의 아들로 전두환 일가 중 처음으로 지난 3월 31일 광주를 방문해 5·18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생존자에게 사죄했다. 그는 “저의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5·18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고 학살자임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5·18 묘지를 처음 방문한 우원씨는 방명록에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계신 모든 분이십니다”라고 적었다. 우원씨가 지난 17일 5·18 추모식에 참석한 것도 전두환 일가 중에서는 처음이다.

전우원씨의 사죄에 광주를 포함한 전국이 들썩했는데, <전대신문>이 지난 7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만난 시민들도 전씨의 묘지 방문과 사죄를 언급했다. 한민숙(72)씨는 “전두환 손자가 이곳에 와서 추모하는 것을 봤다”며 “전두환 손자도 오는 이곳을 나는 한 번도 안 가봤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묘지를 찾았다”고 말했다. 김경석(65)씨는 “그 집안에서 사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유가족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며 “전우원의 사과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진심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우원씨가 전남대를 찾은 지난 18일 <전대신문>이 대학 신문사에서는 최초로 전씨를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이날 우리 대학 제1학생마루 2층 전대신문 편집국에서 진행했다.

-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제가 개인으로서 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많은 분들이 저한테 관심을 가져주심으로써 제 할아버지의 만행이 됐든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해 돌아가신 영웅분들께 조금이라도 전국적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저도 이런 생활을 처음 해보고 저 스스로가 완벽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저를 믿어주시고 지지해 주실 때 죄책감도 많이 들고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처음 방송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요.

“저는 회계법인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회사였고 제가 제 가족의 범죄 행위를 폭로하면 그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어 회사를 배려해 미리 사직서를 냈습니다. 제가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말을 해야겠다고 한 번에 결심했다기보다는 살아오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 이번에 터져 나온 것 같습니다. 참지 못하고요.

제가 처음으로 제 가족의 반응이나 주변 사람들의 죄, 그리고 저에 대해서 공개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셨는데 그 관심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고, 그래서 지금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관심이 유지되는 한에 있어서는 계속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는 것 같습니다.

제 가족 비자금 관련해서도 많은 분들을 찾아봬서 소신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발언해서 알려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제가 오월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광주를 찾은 것은 이번이 몇 번째인가요?

“네 번째입니다. 처음 한국에 오자마자 광주에 왔었고 그 이후에도 (5·18 유가족) 어머니분들 뵙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존자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치유해드릴 수 있었으면 해서 이후에도 한두 차례 정도 더 왔었습니다. 그리고 어제(17일) 왔습니다.”

전우원씨는 지난달 27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 일대에서 진행된 제43주년 5·18민중항쟁 기념 부활제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광주에 찾았다. 우원씨는 부활제에서 헌화한 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할아버지 탓에 광주 시민을 비참하게 죽였다”며 “가족을 대신해서 재차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우원씨는 지난달 29일까지 광주에 머무르며 민중항쟁 사적지를 방문하고 정동년 전 5·18기념재단 이사장 1주기 추모제에 참석했다.

- 5·18 생존자를 만나고 어떠셨나요?

“저는 ‘도청 지킴이 어머니’ 단체를 통해서 (유가족인) 어머니를 많이 뵀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남편을 잃으시거나 아들을 잃으시거나 딸을 잃으시거나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잃어버리시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당사자가 사과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않고 당사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과가 결국은 피해받은 분들이 최대한 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또 전두환씨의 아들과 딸들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테니, 나중에는 그분들도 다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회개하고 여기 계신 분들이 최대한 마음의 치유를 받으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진상규명도 제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계속 많은 분들이 조금이라도 제 행동을 통해서 마음이 움직이셔서 소신 발언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많은 분들이 뭉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번에 와서 보니 (5·18) 재단분들도 그렇고 단체 분들도 그렇고 많은 분들의 화합이 어려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제 가족 일가는 굉장히 극소수가 똘똘 뭉쳐서 있다 보니까 좀 걱정이 많이 됩니다. 특히나 진상규명에서 지금 살아계신 분, 겪으신 분들의 증언도 많이 필요한데요. 점점 나이 드시고 더 돌아가시게 되면 나중에는 진실이 왜곡되고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많이 됩니다.”

- 할머니에게서 받은 문자가 공개되기도 했는데요.

“(그분의) 속마음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렇게 두려워하는 제 가족 구성원들인데 실제로 당시에 권력을 갖고 폭력을 휘둘러 광주에 있던 분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셨을 걸 생각하면…. 살아오면서는 저의 할머니였는데 제삼자라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만행을 저지른 분의 부인이자 또 그분을 옹호하는 분이니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할머니한테 연락이 온 것과 제가 광주에서 받은 유가족 어머니분들의 말씀이랑 너무 비교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계신 할머니분들께서 너무 따뜻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도 하셨는데 저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제 가족한테 받지 못했던 인간적인 따뜻함을 광주 시민분들이 저에게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 오늘 전남대를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남대가 5·18 사적지 1호인 이유가 있잖아요. 여기서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됐고요. 시대적인 어둠을 학생분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정과 희생으로 비추셨고 그것은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전남대 기록관(용봉관 내 역사관, 구본부)이라고 하나요? 그곳에서 교내에 군인과 경찰이 많은, 당시 광경을 담은 사진들을 봤습니다. 상상조차 못 할 만큼 굉장히 억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그걸 보면서 당시에 경찰을 상대로, 군인을 상대로 시위를 한다는 건 목숨을 건 행위였을 텐데, 정말 무서웠을 텐데, 살날이, 앞이 창창한 학생분들이 목숨을 희생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킨 공간이니까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또 결국에는 그분들의 희생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오게 됐습니다.

전남대를 둘러보는 게 목적이었다기보다는요. 학생분들을 뵙고 싶었습니다. 5월 18일에 관심이 있으신 학생분들이 아무래도 여기 많으실 테니까 그분들의 생각도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또 앞으로 이 학생분들은 과거의 민주화운동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에 어떻게 녹이고 싶은지, 그런 것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저는 점점 늙어가고, 생각의 발상에도 한계가 있을 텐데 학생분들은 워낙 똑똑하시고 창의적이시니까 그 생각들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나요?

“제 의도랑은 다르게 방송 관계자분들이 워낙 많이 계시다 보니까 학생분들도 불편해하시고 사진만 찍고 가시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전대신문) 기자님이 오셔서 인터뷰하자고 하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도 광주에 잠시 왔다 갔었거든요. 그때는 JTBC 분들이랑 MBC 분들 통해서 학생분들이랑 인터뷰 할 수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저는 전남대학교 학생분들이랑 조선대학교 학생분들 다 같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때 조선대 학생분들이랑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되게 안타까워했었는데 오늘(18일) 올 수 있게 돼서 너무 다행입니다.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진짜 (전대신문 기자가) 오셨을 때 너무 좋았습니다. 학생분들이 솔직하신 것도 있으니까 좀 더 솔직한 생각도 많이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방송국 분들을 통해서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경험하거나 배우지 못한 것들을 학생분들을 만나 어떤 심정인지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 5·18을 교과서의 내용으로만 이해하거나 박물관 안에 갇혀 있는 역사적 사실로 접하게 되는 현실을 지금의 학생들은 지적합니다.

“조선대 학생분들이랑 대화했을 때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학생회장과 부회장님이 나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학생회장님 부모님이 1980년생이었습니다. 광주 내에서도 이것이 교과서 안에 있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로 변했고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당시 오월을 경험하신 세대분들만 이 내용을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에 있었던 일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함께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 일을 겪은 분들을 뵈면 그제서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 이게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일이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구나.’ 당시 그분들도 이렇게 잔인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도 못 하셨을 텐데 결국 일어났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국군들이 오히려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잔인하게 진압하고….”

- 생존자는 5·18의 면면들과 희생을 후세대가 기억했으면 하는 소망과 책무로 힘들어도 증언을 합니다.

“모순적인 것이 실제 피해당하셨던 분들의 아픔은 점점 역사 속에서 잊혀 가게 되는데 제 가족이 부당하게 그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권력을 차지하고 부를 축적한 것은 그때 이후로 더 늘어가고만 있습니다. 과거의 재산이 더 늘어나는. 그 돈도 비리가 많이 껴 있는 돈이다 보니 그게 참 마음이 아픕니다.”

- 이 기사를 읽는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번에 캐나다 총리분이 오셔서 5월 18일 관련해서 길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스스로 창피함이 들 정도로 굉장히 깊게 공부를 하셔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말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라서 대단하다”라고. 그 뒤에 “그런데 민주주의가 계속해서 지켜지려면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저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를 기억해서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결국 인권 보호잖아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건데 오월 정신을 계승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이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 희생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아끼고 보듬어줄 수 있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같은 시민이라고 했을 때 화합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가 안에서 분단이 심하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유언비어도 심하고요. 광주에 계신 분들을 색안경 끼고 보시는 분도 많잖아요. 그것이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자 분들은 한평생 낙인과 같은 왜곡의 말을 들으며 살아오셨는데 그 마음이 쉽게 풀릴 수 없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그때 그 사건으로 인생의 영향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망가짐이었는데, 갑자기 제가 와서 사과 한 번 한다고 그걸 놓아버리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자주 광주에 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계획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징적으로 제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였다는 것, 그리고 그 가족의 피를 받은 사람이 가족 내에서 가족의 잘못을 알고 사죄하고, 또 제가 가족 비자금 관련해서도 많이 알고 있고요. 그게 수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초반에 많았습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각종 방송사 분들을 통해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최대한 증거 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그걸 방송으로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 광주에서 고립화되는 것도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고 싶어서 SBS, MBC, KBS와 모두 소통했고 모든 국민분들이 어떻게든 접할 수 있게끔 하려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제가 기도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한 분 한 분이 이것을 보시면서 ‘전두환 일가가 진짜 이런 가족이구나’ 알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피해받으신 광주 시민분들은 얼마나 억울할까’를 조금이라도 공감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아주 큽니다.

방송이 다 나가고 나면 저도 이제 크게 할 수 있는 게 진짜 없습니다. 제가 광주에 오는 것도 처음에야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지만 가면 갈수록 관심도 줄어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자금 관련된 것도 지금 이렇게 탄력을 받았지만 만약 여기서 진짜 모든 게 끝나버리면 그냥 끝나고 마는 거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기도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억울한 분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분들의 한을 최대한 많이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 5·18 당시 도청에서 고교생으로 사망한 고(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오느라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라며 전우원씨를 위로했습니다.

“제가 겪은 것은 그분들이 겪은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삶을 잃으신 분들은 이 세상에 없지만 저는 그래도 아직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삶을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제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워낙 그분들의 사상이 강하고요. 제가 세상을 통해서 듣는 정보와 가족들이 내부적으로 저한테 보여주는 거짓된 모습들의 괴리감이 너무도 컸습니다. 정상적인 대화나 정보의 교류가 불가능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분들이 원하는 것만 전달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냥 받들고 따르고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오랜 기간 참으면서 지내다 보니 진짜 그분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경계심이 없으시니까요. 그것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제가 알 수 있는 기회이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전우원씨가 전대신문과의 인터뷰가 끝난 후 전대신문 제713호 복제본을 살펴보고 있다. 713호는 1980년 5월 15일자로 발행된 신문으로 당시 '민족·민주화 대성회' 내용이 주요하게 담겨있다. 이 신문은 1980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신문으로 원본 1부가 전대신문 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당시 신문사는 계엄군에게 취재자료와 남겨진 신문 원본 등을 모두 빼앗겼으며 휴교령으로 약 4개월간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다.
전우원씨가 전대신문과의 인터뷰가 끝난 후 전대신문 제713호 복제본을 살펴보고 있다. 713호는 1980년 5월 15일자로 발행된 신문으로 당시 '민족·민주화 대성회' 내용이 주요하게 담겨있다. 이 신문은 1980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신문으로 원본 1부가 전대신문 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당시 신문사는 계엄군에게 취재자료와 남겨진 신문 원본 등을 모두 빼앗겼으며 휴교령으로 약 4개월간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다.
전우원씨가 박진우 5·18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에게 우리 대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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