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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을 배반하고 퍼질러 앉아 버렸다. 내 죄악을 고백해보자면 그렇다. 원으로 둘러앉은 열댓 명의 사람들. 그중 내 자리에서부터 오른쪽으로 4칸 떨어진 자리에 앉은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남자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여자에게 반해버렸다 고백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죄악이란다. 무슨 말인진 알겠으나, 그가 한 고백이 과연 정확한 의미의 '고백'인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내뱉는 문구 하나하나가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혼잣소리에 갇히고 말았다. 여기서 한 꺼풀 더 진실하여 보자면, 이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남의 고백을 듣고 싶다거나, 남에게 나의 고백을 들려주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에겐 어느 순간 들어오게 되는 생각의 방에서 혼자 주절거리는 순간이 필요하고, 그 순간을 가장 자주 그리고 주기적으로 맞이하게 해주는 것이 이 모임이기에 나는 이 모임을 애정했다. 그러고 보면 '어쩔 수 없이' 갇혔다기보단 '어김없이' 갇혔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 듯싶다. 어쨌든 혼잣소리에도 이렇게 오류가 많은데, 남에게 하는 소리가 완전히 진실될 순 없겠지. 남자는 고개를 완전히 숙이지도, 들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태연히 풀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떠들게 놔두고, 나는 잠시 혼잣소리에서 깬 틈을 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내 맞은편에 앉아 가끔 나를 보며 미소 짓고 많은 얘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다정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인상을 받은 이 모임의 회장이 있었고, 회장 옆에 앉아 속죄하듯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회장의 부인이 있었다. 나는 회장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회장 부인의 이름은 이상하게도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가 생각해보았더니 매번 회장의 고백에는 회장 부인, 그러니까 선영 씨의 이름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회장은 부인을 언제나 '선영이'라고 불러댔으니, 모임의 거의 모든 회차에 참석한 내가 선영 씨의 이름을 모를 리는 없었다. 선영 씨는 이야기를 듣는 모습처럼 평소에도 다소곳이 사람을 대했고, 그런 성향에 걸맞게 말수도 아주 적은 편이었다. 선영 씨 외의 사람들은 회장을 ‘회장님’이라 불러댔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대체할 수 있다면 존재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선영 씨에 비해 지금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남자는 말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 진심을 토해내어도 결국 지겨워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모임을 할 때마다 남자는 좌중을 압도하는 언변으로 수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나는 그보단 말 한마디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영 씨의 숨 하나하나에 몰입되곤 했다.

선영 씨와 회장의 모습을 한 시야에 담고 가만히 멈춰 있는데 어김없이 나를 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그 사람이 누군지 보았으나, 애초에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잘라, 본 나이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젊은 소설가는 진수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젊은 소설가라는 존재가 대개 그렇듯 그는 모호한 꿈과 불확실한 현실감각을 분명한 기세로 받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내 삶에 잠시 들렀다 간 소설가들은 재잘거리거나 과묵한 편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재잘거림을 경멸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인지라 소설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다가오는 진수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자기 일을, 그것도 소설 쓰기라는 특수한 작업을 자연스레 밝히며 다가오다니. 좋지 않은 신호가 쌓여가는 흐름이었다. 다만, 진수는 자신을 소개하고는 구태여 다른 소리를 덧붙이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 이상의 상호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마지막 순서였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면 모임은 해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원 모양으로 놓여있던 의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두고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메는데, 진수가 다가왔다.

“오늘 모임도 수고하셨어요.”

나는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 그에게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했다. 끝인사 정도는 나누던 사이였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원래라면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 자신의 월셋집으로 걸음을 옮겼어야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잠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 되시나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잠깐 시간 되느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도 내 앞에 서 있던 건 소설가였다. 떠도는 삶이 궁금할 수 있겠지, 글감이 되긴 하려나? 하고 생각하며 그의 대화 요청을 수락했었는데. 그때 생각을 하니,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구나 싶었다.

“어떤 걸 여쭤보신다구...”

나는 진수에게 되물으며 창밖으로 앙상해지는 나뭇가지를 보았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되는 시기. 나는 이곳에서 벌써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맞닥뜨리고 나니 진수와의 대화가 더부룩해졌다. 질문은 던졌지만, 어떤 대답을 해도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으리라. 혼자서 결심했다.

“팁을 좀 알고 싶어서요.”

당황. 인생을 헤집어 놓을 해부사인 줄 알았더니 날 줄 모르는 애기 새였다. 근데 무슨 팁을 알고 싶다고 나한테 말을 건 건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더부룩한 느낌이 일순간 사그라들었다. 어쩔 수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무슨 팁 말씀이죠? 전 아는 게 그다지 없는데요.”

“모임에 참석하며 선생님 이야기를 듣다가 오랫동안 유랑하는 삶을 살아오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찾아보고 했는데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어서 혹시 괜찮으시면 관련된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진수는 편하게 두 손을 다리 옆에 늘여드려 놓고 이야기를 끝 맺혔다. 진수의 이야기가 끝나고 든 생각은 내 예상이 맞았다,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묵하기보단 재잘거리는 과였다. 넘쳐나는 언어들을 가지런히 줄 세워 내보내는 타입. 길어지는 문장에 지겨움이 올라오려다 그의 가지런히 늘어진 두 손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진수는 재잘거렸지만, 귀여운 아이였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나와 진수는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그는 자신의 월셋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집에 들어가니 거실이 아침에 본 그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당연하다는 감각이 익숙지 않아 기이하게 여겼다. 왔다 갔다 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두 개의 세상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기분이다. 관성적으로 운명에 휩쓸리는 육신 하나와 닻 내리고 미련하게 버티는 육신 하나. 이 몸 저 몸 빙의하며 옮겨 다닌다.

늦은 아침 식사. 11시가 넘었으니 점심 식사로 하겠다. 어제저녁에 먹던 거 그대로 먹었다. 어제와는 식감이 다르다. 하나같이 시간이 지나면 굳어진다. 인간을 두고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만 적응은 누구나 다 하는 거 아닌가. 살다가도 문득 생경함을 느끼는 인간은 과연 적응을 잘하는 것일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식물을 입안에 넣고 반으로 가른 뒤 오른쪽 왼쪽 어금니로 꼭꼭 씹었다. 무엇이 입안에 있는지 떠올렸다. 돼지고기 삼겹살과 각종 채소를 넣고 볶은 제육볶음과 저 저번 주 시장에서 사 온 열무김치, 식은 밥. 그리고 이 생각을 하는 순간에 쌈장을 젓가락으로 찍어 입안에 추가했다. 무엇을 씹고 있는지 알면 어떤 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했었나. 적응은 쌈과 같은 것. 어떤 순간을 씹는지 모르게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쌈 채소 옆에 두고 삼겹살만 집어 먹던 나에게 “쌈 안 싸 먹는 게 이쁘다”고 했었지.

점심을 먹고 집 주변 산책로에서 조깅한다. 식은 채로 덕지덕지 묻은 땀을 목욕탕에서 얼큰히 씻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가 되기 전이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경제활동을 시작한다. 내 유랑생활자금을 담당했던 건 주식투자였다. 열다섯 때부터 했으니 자그마치 18년째였고, 그만큼 습관적이었다. 매달 1% 이상만 얻어내면 되는 게임. 큰 긴장이 필요하지 않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장을 보고, 자료들을 찾아가며 시간이 흐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격렬한 기쁨을 느낀 적은 없다. 애초에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도박보단 농사를 선호한다. 어딘가에 머물기엔 그림자가 없으니 돈이라도 농사짓듯 벌 수밖에. 숫자들을 보는 데엔 길어봐야 두 시간이 최대다. 그 이상 시간이 흐르면 혼잣소리에 빠져 버린다. 굳이 의자에 앉아 불편하게 있을 필요 없으니 컴퓨터를 끄고 나오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시간을 지킨 것이 되어 버린다.

침대에 누워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침실에 난 창은 마을과 마을을 둘러싼 산을 보여주었다. 해가 집 뒤로 넘어가고 방 안도, 방 밖도 캄캄해졌을 때 부르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진수가 보낸 문자였다.

‘내일 주말인데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주말이 좀 부담되시면 다음 주 주중에도 괜찮아요. 편한 날로 정해서 알려주시면 거기 맞출게요.’

휴대전화 화면만 보인다. 쨍하니 빛나는 걸 보다가 다시 어두컴컴한 천장을 보니 안구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휴대전화 밝기를 낮추고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 좋네요. 어디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거기 가면서 이야기 나누면 어떨까요? 생각해보니까 진수 씨도 좋아하실 것 같은 장소라 추천도 할 겸.’

점 세 개가 깜빡깜빡. 십 초 정도 기다리니 답장이 왔다.

‘저는 너무 좋죠. 그럼 내일 어디로 가면 될까요?’

‘9시에 모임 하는 건물 현관에서. 어때요?’

‘넵.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네. 쉬세요.’

누구랑 동행해야 하나 했는데. 효율적으로 일정을 짠 것 같아 뭔가 뿌듯했다.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두고 거실로 나가 등을 켰다. 어제저녁에 먹던 걸 오늘 저녁에도 먹고 싶지 않아 음식물쓰레기로 모두 버려버렸더니 먹을 게 없었다. 재료도 마땅한 게 없어서 다시 침실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나왔다. 배달 어플로 들어가 스크롤... 그렇게 한 시간을 끙끙 앓다가 포기하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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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벅서벅. 패딩점퍼의 발 부분이 서로 쓸리는 소리였다. 건물 옆에 아들처럼 서 있는 나무가 있는데, 거기 아래에 진수가 있었다. 진수는 나를 발견하곤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진수와 나는 아파트 단지 앞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진수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오늘 어디 가는 건가요?”

“음... 서프라이즈로 하고 싶은데. 기대해도 좋아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보며 끄덕이는 진수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웃으니 진수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사그라들고 나는 진수에게 말했다.

“편하게 물어봐요. 궁금한 거.”

“네. 잠시만요.”

진수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두 번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진수는 종이를 펼쳐 내게 내밀어 보였다.

“질문 리스트예요. 뭔가 막 묻기가 힘들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리스트엔 질문들이 러프하게 적혀 있었다. 경제활동은 어떻게 하는지. 유랑을 하는 데 있어 준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는지. 질문은 생각보다 필수적인 것들이었고, 동시에 구체적이지 않았다.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대답하는 형식이 과연 진수에게 도움이 될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인터뷰처럼 하지 말고, 그냥 이야기할까요?”

진수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내 말에 기분이 좋은 듯 끄덕거렸다. 그는 가방을 열어 종이를 넣었다. 때마침 버스도 정류장으로 달려왔다. 진수와 나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처음 이 부탁을 받았을 때가 작년쯤이었을 것이다. 수생식물처럼 살아간다는 게 생각보다 특이한 일이어서 그런 특이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연락을 받고, 그중 몇몇은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오기도 했다. 승연과 재훈도 그런 식으로 연락을 하는 사이였고, 때마침 내가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그들은 내게 제안 아닌 제안을 했다.

“우리 책방에서 동인지를 만들게 되었는데 혹시 한번 감수해줄 수 있어? 굳이 전문적일 필요는 없는데.”

내게 전화해 온 것은 재훈이었지만, 언제나처럼 그들은 함께 있었고, 동시에 구호를 외치듯 이 말을 나에게 전했다. 어떠한 창조물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 완전하지 않은 형태를 마주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이내 곧 덧붙인 ‘굳이 전문적일 필요는 없’다는 말에 부담을 애초에 없었다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저 글을 읽는 것뿐이고, 그 일은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 나에게도 꽤 적성에 맞겠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퍼질러 앉아 대면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런들 어떠하랴. 오히려 잘되었구나 하고 그들은 쾌활히 소리쳤었다.

승연과 재훈을 처음 만난 것은 한 6, 7년쯤 전이었다. 나는 그때 파리에 있었는데,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던 시기였다. 파리에 거주하는 동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나도 간만에 한 지역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던 차였기에 우리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나와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던 재훈은 내 방문을 강하게 두드려 나를 깨우곤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생의 사랑을 찾았어.”

샤를 드골 공항에서 우연찮게 그를 알게 된 후로 정확히 열네 번째 들었던 말이었기에, 나는 “음. 그랬군. 잘됐네.” 하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스르륵 물러났었다. 하지만 재훈은 그런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내 몸을 흔들어 다시 나를 깨운 후 그녀를 보러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오늘 잠은 다 잤구나.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코트를 몸에 걸치며 생각했다. 재훈의 무대뽀 성격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이 더럽고 냄새나는 도시에 구르면서도 눈동자에 알알이 맺힌 빛을 잃지 않은 걸 봐도 그랬다. 새벽 1시가 넘어가던 시간에 재훈과 나는 도로를 가로지르며 파리의 유명한 화가가 열었다는 파티에 슬며시 몸을 밀어 넣었다. 나를 이끌던 재훈은 인파에 떠밀려 사라지고, 나는 관심도 없는 그의 ‘운명적 사랑’을 찾으려 그보다 더 관심 없고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들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 때 나는 한 여인을 마주했다. 직감이 반응했다. 이 사람이구나. 재훈의 운명적 사랑, 그 녀석 말로는 ‘인생의 사랑’. 아니나 다를까 재훈은 잔을 들고 그 여인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중이었다. 그녀는 내게 재훈의 친구냐면서 자신을 ‘승연’이라 소개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두 달 정도 함께 어울리며 파리 곳곳을 싸돌아다녔다. 나는 천성에 못 이겨 지구 반대편, 그러니까 남미의 어느 작은 도시로 다시 거점을 옮겼지만, 그들은 내가 멀리 있든 말든 내 운명을 이야기하며 떠들기를 좋아했다. 그 둘이 결혼하고, 한국에 집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떠돌아다니는 내 처지를 이야기하며 떠들어댔었다.

어쨌든 그때의 기억이 아름다웠던 건지, 아니면 연락을 이어준 은혜에 감사했던 건지 그들과의 인연은 이처럼 이어져 오고 있었다. 나는 버스 창가에 팔을 올리고 승연과 재훈의 얼굴을 떠올리다, 내 옆자리에 앉아 얼이 빠져있는 진수의 존재를 잠시 까먹고 있었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나는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고 진수의 얼굴을 보았다.

“소설을 쓴다고 하셨죠?”

진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는 “네, 네!” 하고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에게 물었다.

“요즘 어떤 소설을 쓰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

진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누가 어깨를 두드린 듯 몸을 짧게 떨어내곤 가방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종이 다발은 스테이플러 심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 예상치 못한 선언을 마주하게 된 영화감독의 이야기에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생각지도 못한 선언을 하고, 영화감독인 주인공은 그것을 부정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요.”

“음. 왜 부정하나요? 그 사람은.”

“선언한 사람을 사랑해서요. 하지만 그 사랑은 한계가 분명한 사랑이었어요. 주인공의 유랑은 어쩌면 그 사랑의 저변을 넓히는 활동인 거죠.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만나야 생각의 걸음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곤 하잖아요.”

“그렇죠. 근데, 그 선언이란 건 뭐죠? 제일 중요한 걸 안 들었네요.”

“아... 근데 뭔가 그건 말씀드리기가 조금 꺼려지네요. 아직 그 내용에 자신이 없거든요. 죄송해요.”

“꼭 들어야겠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더 미안하네요. 꼬치꼬치 캐물은 것 같아서.”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집에서 혼자 글을 쓰다 보면 괜히 누군가한테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 무얼 쓰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막상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글이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결국엔 쓰게 되거든요.”

"좋네요. 결국 쓰게 된다. 운명적인... 무언가."

"운명을 믿으세요?"

별거 아닌 질문도 때론 날카로운 송곳이 될 때가 있고, 나에게도 그러했다. 옛날부터 그랬다. 생각지도 못하게 맨살을 드러낸 곳을 찔리게 되면 움찔하고는 꾹 입을 다물어버리는 습관이, 그 옛날, 떠돈다는 행위의 의미를 몰랐을 때부터 내 안 깊은 곳에 자리했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진 않아도 흘러가는 존재라,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을 나도 모르게 잃어버리고, 그것에 헛헛함을 느끼면서도 결국 이게 인생이지 하며...

"죄송합니다. 너무 폭력적인 질문이었나요?"

진수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고,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또 내 멋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구나 하고. 분명히 이건 나쁜 습관이었다. 상념이 깊어지기 전에 끊어준 진수에게 나는 미소를 짓고 "아니에요. 멋대로 심각해져 버렸네요. 질문엔 문제없었어요."라고 답했다. 실제로 별거 아닌 질문이었다. 그냥 "그런 편이죠." 하고 말하면 될 문제였다. 나는 운명을 믿는 편이었으니까.

진수와의 대화는 그렇게 사그라들고, 버스는 교외 지역을 벗어나 시내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진수는 불편해 보였다. 요즘 남을 신경 쓰는 버릇이 생겼나. 시내 대형서점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진수에게 말했다.

"오늘 어디 가는지 모르죠."

진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쓸면서 내 얘기에 집중했다. 나는 뜸을 들이다 진수가 침을 삼킨 순간 보따리에서 보물을 꺼내듯 말했다.

"책방에 가요. 제 친구들이 하는 곳. '각주'라고 들어보셨어요?"

진수는 "어, 친구들이랑 가본 적 있는 곳이에요."라고 답하며 얼굴에 생기를 띄웠다. 그 생기가 반가웠다.

"친구 녀석이 말하길 자기는 각주처럼 살았대요. 메인이 아니라 그 옆의 설명처럼. 문학도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 뭐라나. 또 다른 친구는 그 얘기를 듣고만 있었죠. 웃으면서."

"오, 좋은 말이네요."

반응을 해주니 말할 기분이 생기고, 나는 그렇게 승연과 재훈을 만나던 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버스는 익숙한 장소를 지나쳤고, 하차 벨을 누르자 이야기는 멎어 우리를 '각주' 책방 앞에 서 있도록 했다.

"전보다 늘었네."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그에 따라 책방을 찾는 현학적인 위인들도 늘어났구나. 책 앞에서 주절거리는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재훈에게 말했다. 재훈은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조금 닥치고 있을래, 하는 눈빛을 나에게 쏘았고, 나는 그것에 응했다. 승연에게로 돌아가는 재훈을 뒤로하고 나는 책방 주인들이 큐레이션 해놓은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진수는 책방에 들어오자마자 책 하나를 찾아보고 싶다며 휙 날아갔고, 그 덕분에 나는 홀로 편안히 책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해외 문학 코너를 서성거렸다. 웃긴 일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방인 중에서도 '비협조적인 이방인'이었다. 머무는 나라의 언어는 할 줄 모르고.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극히 실용적인 최소한의 영어로 간신히 돌아다녔다. 파리에 있을 때든, 콜롬비아 살렌토에 있을 때든, 오키나와에 있을 때든. 그 외 여러 국가, 여러 지역에서 나는 눌러살 리 없는 일회용 NPC였으니 세계 각국의 문학에 관심이 있었을 리가. 나는 읽는 것보단 듣는 걸 좋아했고, 쓰는 것보단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물론 그마저도 그리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승연과 재훈이 골머리 싸매며 골라 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들의 면면이 하나하나 지나갔다. 니들이 내 걸음을 멈출 수 있을까. 후후후 멈춰보려면 멈춰보시지. 하지만 나는 멈추었고, 심지어는 그 책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뭐 새삼 놀란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이 떠오른 것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곧, 몇 안 남은 내 어린 시절 기억이다. 기억은 겉면에 점성이 있어서, 서로 엉키고 달라붙기 시작하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떠난 날 이후의 기억은 서로 엉켜 있어 주체와 배경과 내용이 마구 뒤섞인 채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덩어리는 현실을 살아간다는 자각을 옅게 만들기 충분했다. 현실이 보이지 않으면 도피할 수 있고, 나의 유랑생활은 도피의 연장선에 있었으니,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떠나기 이전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것들은 두껍고 거대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기에 자기들끼리 얽히고설키며 결국 형체를 소실하고, 어느 절벽 아래로 풍덩 빠져버렸다. 기억이라기보단 그저 나도 그때의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인식만 있을 뿐, 추억이라거나 사소한 이미지 같은 것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은,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착잡하게 만들고 또 한 번의 이동을 말미암는 그런 이미지들은, 여러 순간 되뇌는 과정을 통해 일종의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로 인해 존재했다.

그녀를 기억하는 것도 어쩌면, 그녀가 내 인생에 있어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어떠한 지점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아주 어릴 적,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도. 내가 들고 있는 책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였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와서 너한테 그림자를 팔라고 하면 너는 그림자를 팔 거야?”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도 그림자를 판다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대신 고개를 저으며 “안 팔래.”라고 답했다. 그녀는 책을 다시 펼쳐 문장 몇 개를 읽고는 말했다.

“나는 팔 거야.”

이유는 묻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기억은 여기서 멈추고 다시 다른 기억의 시작점과 얽혀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왜 팔 건지 묻고, 그녀는 나에게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 기억이 절벽 아래로 풍덩 빠져버렸는지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책의 겉면은 종이의 결이 보이는 매끈한 종이로 되어있었다. 승연은 “이거 아르떼지야.”라고 말하며 의기양양했다. 나는 아르떼지가 뭔지도 모른 채 오, 하고는 겉면을 쓰다듬었다.

“견본이라 아직 보완할 게 많지만, 우리 여행가 선생님을 위해서 조금 무리해 봤어.”

책장을 휘리릭 넘기자 종이에 갓 스며든 잉크 냄새가 났다. 승연과 재훈은 나를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뒤로 계산대에서 책을 계산하는 진수가 보였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잘 읽을게. 다음 주까지 주면 되지?”

“줄 필요는 없으시고요. 그냥 다음 주에 오세요.”

“그려.”

책을 패딩 안주머니에 넣고 두리번거리는 진수가 보이도록 손을 들었다. 진수가 다가오자 승연이 말했다.

“진수 씨도 글을 쓰신다면서요? 저희 책방에 공간이 많아요. 자주 놀러와요.”

허리를 숙이며 진수는 인사. 승연은 그런 진수가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재훈은 급하게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저희 책방에서 내는 동인지에요. 관심 있으면, 무슨 말인지 아시죠?”

능글맞게 영업하는 재훈과 웃으며 그런 기회가 있으면 참여하고 싶다, 말하는 진수. 승연은 말했다.

“이제 조금 적응돼?”

음... 고개를 끄덕.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와 진수는 승연과 재훈에게 인사하고 책방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버스는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갔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앞으로 바라보는 진수에게 물었다.

“왜 떠나고 싶어요? 여기를.”

가방에 진수의 턱이 닿았다.

“떠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떠난다는 건 무서운 일이잖아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제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봤어요. 요즘 같은 시대는 간접 경험이 풍부하니까 정말 생소한 것들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그려졌어요. 근데 뭔가 집 없이 살아가는 삶만큼은 저도 감이 잡히지 않더라고요. 계속해서 자신을 옮기고, 유영하듯 살아가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정말로 멋있는 건지. 매력적인 건지. 그래서 선생님을 귀찮게 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야기하다 보면 갈피가 잡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해가 넘어가는 게 보인다. 산등성이 뒤로 발을 담그고 나를 쳐다본다.

“그런 마음이면 어때요. 유랑에 특별한 이유는 필요 없어요. 이 시대는 떠돌기 좋은 시대거든요.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빼도 박도 못 하게 엿장수나 했겠지만, 그렇진 않았잖아요. 한 번 살아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죠. 뭐든 해봐야 아니까, 아니까 하는 게 아니라.”

“저도 그런 마음이에요.”

진수는 희망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진수의 얼굴을 보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었다. 유랑하는 삶을 살게 된 계기는 무엇이고, 어떤 감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나를 다음 지역으로 떠미는 운명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나는 그 삶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저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것으로 대신하라는 충고도. 모두 목젖 아래로 삼키고 그냥 진수의 입꼬리에 걸린 희망만 보았다. 나의 삶은 그러했어도 진수의 삶은 그러하지 않으니까. 인생은 살아봐야 아는 것. 그전까지는 추측에 불과했다. 그를 오래 알지 않았고, 지금도 그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사람은 흘러가. 시냇물처럼. 끝없이 연속되고 또 밀려가. 지금도 밀려가고 있는데 어디로 어떻게 밀려갈지 어떻게 알겠어. 불안하면 나를 봐. 나는 너랑 같이 여기 있어.”

그녀의 말처럼 진수는 흘러가야 했다. 흘러가는 내가 할 말은 이게 전부였다. 밤의 색이 번지고 있었다. 하차 벨을 누르고 몇 초 있으니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
“오늘 즐거웠어요. 많은 걸 얻고 갑니다.”

“조언을 해주려고 만난 건데. 종이에 적어온 건 얘기하지도 못했네요. 하나도.”

“그럼 다음에 또 뵐까요?”

진수의 손이 다리 옆에 가지런히 늘어져 있었다. 그 손엔 뭔가 능력이 있었다. 거절하지 못하고 그냥 “네”라고 말하게 하는 능력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 진수도 내 움직임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또 봐요.”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진수는 자신의 월셋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아파트 단지 안 관리사무소를 지나는데 어떤 남자가 보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나는 그의 얼굴이 낯익었지만,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서 뵙네요. 어디 다녀오는 길이세요?”

“네... 누구 기다리시나 봐요?”

“저희 아내요. 오늘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거든요.”

남자가 누군가 했더니, 모임 속 그 말 많은 남자였다. 자신에게 헌신하는 아내를 두고 새로운 여자에게 반해버렸다던. 호기심이 픽 하고 쓰러져 버렸으나. 그래도 나는 말했다.

“좋은 남편이시네요.”

근데 왜 그런 일이 생긴 겁니까? 그저 마음일 뿐이었기에 힐난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생긴 거미줄 같은 불호는 쉬이 걷히지 못했다. 남자는 내 말을 들었고, 살짝 쑥스럽다는 듯 바닥을 보다가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내가 왔네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루는 무슨. 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걸. 달려가는 남자를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데 문득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생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옆자리 짝꿍 다음이던가. 뒤돌아 남자를 보니 자신의 아내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숙였고. 나는 미소를 짓고는 아파트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17층에 있었다. 계단을 빠르게 뛰어넘고 9층에 있는 우리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 불은 켜져 있었고, 거실 한 가운데 서서 겉옷을 벗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왔어?”

그녀였다. 나는 신발을 대충 벗어두고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말했다.

“많이 보고 싶었구나.”

나는 말 없이 따뜻한 그녀 몸통을 끌어안고 말했다.

“너무 긴 여행이었어. 덕분에 그림자 없이 돌아다녔잖아.”

몸을 이격시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진아는 윗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는다. 나는 점퍼 윗주머니에서 책을 두 권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줬다.

“이건 승연이랑 재훈이가 만드는 동인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 책 네가 나한테 읽어준 거 기억나?”

진아는 책을 받아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그랬었나?” 하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그때 네가 그림자를 팔 수 있다면 팔 거냐고 물었잖아. 그래서 나는 안 판다고 했고. 너는 판다고 했잖아. 그때 왜 판다고 한 거야? 진아 너 겁 많잖아.”

“엥?”

진아는 오른쪽 입꼬리를 치켜세우며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강심장인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게 아닐걸?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네가 그림자를 판다고 했고, 그래서 나도 판다고 한 거야.”

...? 그랬었나. 이것도 엉켜 있었나.

“근데 왜 너도 팔아. 한 명만 팔면 되지.”

“그러게... 아, 몰라. 그냥 네가 좋았겠지.”

진아는 아무렴 어때, 하고 웃었다. 그래. 아무렴 어떨까. 나는 패딩점퍼를 벗고 진아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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