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공기에 코가 간질거린다. 코를 훌쩍이며 절벽에 스며든 안개를 더듬어 보았다. 절벽 아래로 거친 파도가 몰아치고 있으리라. 날카롭게 퍼지는 파도 소리가 안개에 잠겨 보이지 않는 섬의 아래를 상상케 했다. 이 섬의 주민에게 겨울을 알리는 신호는 언제나, 뒤엉키는 파도와 차오르는 안개였다. 무섭게 몰아닥치는 자연 현상은 배를 띄우는 것도 허락지 않았고 그런고로 섬의 겨울은 곧 섬의 고립이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육지로 나와야 했을 때, 할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좋다고만 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고립된 섬이 싫었다. 고향 섬의 겨울이 그 폐쇄성을 빌미로 온갖 소문의 산지가 되고 있음을 알았던 때에는 섬을 변호하면서도, 역시 고향 섬이 싫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섬이 좋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안다. 지칠 때면 섬의 고독이 그리워졌고, 끝끝내 나는 다시 섬에 이끌렸다. 돌이켜보면 섬이 싫다는 생각은 그저 멀리 도망칠 이유가 필요해 만든 변명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떠나고 싶던 것은 섬이 아니라 그날의 기억과 망상들이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에 조금 놀란다. 난 또 이렇게 절벽 위에서 떨고 있다. 동생을 잃기 시작했던 날처럼.

나는 3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이 섬에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돈을 벌어오겠다며 우릴 맡기고 떠났다는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긴 했을까. 돈을 벌어온다고 했다던 말도 할머니의 거짓말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슬퍼야 하나 싶었지만, 무심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내 삶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감정을 느낄 만큼의 비중도 없었다. 부모에게 버려진 사건은 내가 아니라 할머니께 고통이었다. 이따금 할머니께서 우리를 말없이 바라보실 때, 당신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이실 것 같았다. 행여 우리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을까, 그 상처가 덧나진 않을까 늘 조심스러우셨을 테다. 나는 그 일로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는다고, 희미할 뿐인 기억에 슬퍼할 이유가 있겠냐고, 터놓고 말씀드렸으면 좋았겠다는 후회를 한다. 그랬다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보내지 않으셨을는지. 상이. 내 동생. 그 녀석한테 부모에게 버려진 것에 어떤 마음을 느끼는지는 들어본 바 없지만, 녀석의 구김 없는 천연덕스러움으로 미루어보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형제는 사이가 퍽 좋았다. 조그만 섬마을에서 또래라고 해 봤자 우리 둘에 동네 아이들 다섯이 전부인지라 노상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형제의 각별함은 당연한 결과였다. 무리 지어 놀 때면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나 특이한 돌들을 줍기도 하고 물놀이도 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섬 끝의 숲에서 솔방울을 던지며 전쟁놀이를 하거나 술래잡기도 했다. 숲은 동쪽으로 경사져 올라가는 언덕에 있었다. 언덕 정상에 오르면 조그만 공터가 나오고 그 너머는 가파르게 깎인 절벽이었다. 산 정상에 큰 작두를 두고 반으로 갈라버린 듯했다. 어른들은 우리가 숲에서 놀려고 하면 항상 경고했다. 절벽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상과 미소를 함께 보이며 절벽 아래 바다에 떨어지면 큰일이니 주의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경고를 들을 때면 아무렴요, 하고 생각했다. 섬에서 제일 높은 곳인 언덕 정상에서 섬에서 제일 낮은 곳인 바다로 곧장 내리지르는 절벽은 근처만 가도 오금이 저렸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이만 빼고. 그 녀석은 이상하리만치 조심성이 없었다. 밤에 화장실도 혼자 못 가던 놈이, 살짝만 피가 나도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던 놈이, 그 절벽에서만큼은 유독 겁이 없었다.

내가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무렵의 초겨울, 동생과 나 둘이서만 숲에 간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저마다 겨울을 맞이할 준비로 바빴다. 겨우내 섬과 육지를 오갈 수 없으니 필요한 물자를 미리 섬에 들여와야 했다. 들여온 짐을 해변에서 집으로 옮기느라 주민들은 분주히 움직였고 아이들도 예외는 아닌 상황에서, 나이 든 할머니가 유일한 어른인 우리 집은 다른 어른들이 도움을 주어 겨울 준비를 조금 미리 해둔 상태였다. 할 일이 없던 우리는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숲으로 향했다. 어른들은 바빠서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숲에 갈 때면 으레 듣는 경고도 아무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 역할은 내가 대신했다. 동생한테 단단히 일렀다. 절벽을 조심하자고. 심심한 터라 숲에서 놀고 싶기야 했으나 막상 둘이서만 숲에 들어가자니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놀 생각으로 신이 난 동생을 보며 내가 저놈 몫까지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긴장과 다짐도 잠시, 놀다 보니 마음이 풀렸고 나와 동생은 술래잡기에 빠져들었다. 엎치락뒤치락 야금야금 언덕을 올라갔다. 마지막 순간의 술래는 나였다. 동생을 쫓는데 주변에 안개가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상이는 지칠 줄 모르고 뛰었다. 갑작스레 경사가 없어졌다. 정상, 공터, 절벽. 안개는 들어차고, 우리가 어느새 절벽 앞까지 왔음을 깨닫자 나는 잊고 있던 다짐이 생각났다. 소리쳤다. 상이야, 그만 뛰어!

순간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힘이 너무 들어간 다리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엉켜 넘어졌다. 상이의 등에서 땅으로 시선이 꺾인 찰나,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다시 고개를 들자 동생은 온데간데없었다. 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동생의 목도리만이 팔랑거렸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아직 안개가 덜 차 절벽 아래가 보일 터였으나 아래를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에 절벽의 높이 따위가 무섭진 않았다. 절벽 아래로 보일 다른 어떤 장면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겨울을 알리는 거센 파도 소리. 첨벙 하는 소리가 들렸던가. 파도 소리에 묻힌 건가. 13살의 나는 어느 겨울날보다도 몸이 차가워졌고, 어는 서러운 날보다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어른을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고 나는 결국 절벽 아래를 보지 못한 채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안개가 조금씩 다리를 감쌌다. 하늘과 땅이 회색으로 하나 되는 그때, 검은 새 한 마리가 나를 지나 날아가다 이내 안개에 잠겼다. 얼핏 봐도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밖에 작지 않아 보이는 그 새의 덩치에 겁이 났다. 저렇게 큰 새도 있던가. 나는 더욱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가장 의지하는 어른을 중얼거리며 곧장 집으로 가는데 대문 앞에 할머니가 서 계셨다. 왜 나와 계신지 의아했지만 다행이었다. 사고를 더 빨리 말씀드릴 수 있었으니까.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을 열자 울음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본 할머니는 뭘 잘했다고 우냐며, 갑작스레 호통을 치셨다. 뒤이어 이웃 아저씨가 대문 밖으로 사다리를 들고나왔다. 그는 집 마당을 돌아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놈 참 야물다고, 지붕 위에서 무서운 기색 하나 없이 그러고 있냐고, 혼자 내려올 수 있다는 걸 말리느라 용썼다고 말했다. 뒤이어 나를 향해 장난이 짓궂다고 꾸중했다. 그러고는 짐 옮기러 가 봐야 한다며 뒤로 돌아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벌써 혼부터 났다. 무엇 때문에 혼이 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깟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사고를 알리려는데, 아저씨에 이어 대문 밖으로 나온 사람을 보자 나는 모든 할 말을 잃었다. 쭈뼛거리며 대문 밖으로 반쯤 몸을 내민 아이는 상이었다. 할머니의 호통에 놀란 듯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물범벅인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녀석도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날 대문 앞에 선 세 사람 중 펼쳐진 광경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도 나였다.

상이가 여기 있네,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기서 나오지. 여기까지 뛰어오면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는데. 어, 이상하다. ···동생을 절벽에서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다가도, 눈앞에 동생이 보이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동생의 기쁜 생존이라는 이미 나온 결과는 잔상으로 흩어지고, 그 자리엔 미결된 질문만이 남았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거친 물살과 짙은 안개. 우리 세 식구는 다가오는 겨울 기운을 피해 방으로 갔다. 방 안은 불을 때 따뜻했다. 할머니는 나를 윗목에 무릎 꿇리고 한참 혼을 냈다. 동생을 지붕에 올려두고 사라진 못된 장난을 쳤다는 죄목이었다. 그런 적 없다는 항변은 아무 소용없었다. 우린 함께 숲에 갔었고, 절벽에서 상이를 놓쳤다, 그런데 얘가 어찌 여기 있냐,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상이를 아주 잃은 줄 알았다. 고는, 말하지 못했다. 구태여 슬픈 일을 들춰야 하나, 아니 애초에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도 않았다고 멀쩡히 내 옆에 앉아있는 동생이 증명하는데, 여울지는 생각과 질문을 스스로 마무리 짓기조차 힘들었다. 장난친 게 아니라면 무얼 했냐는 질문엔 그래서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형 말이 맞아요, 전 혼자 지붕에 내려간 거예요, 마당에 가려다 실수한 거예요, 형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내가 혼이 날 때 방구석에 쪼그려 어련히 화를 피해갈 수 있었을 동생은 나를 변호한답시고 나서다 사이좋게 같이 혼이 났다.

계속 이상한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어가려거든 밥은 없을 줄 알라고 엄포를 놓으셨지만, 어떤 일이 터져도 할머니가 우릴 굶기는 일은 없었다. 그날 밤 부은 눈으로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을 때다.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와 새근거리는 동생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홀로 뜬눈인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개에 흐려진 달빛이 가느다란 실이 되어 문풍지 틈으로 넘어왔다. 그 차가운 실들이 방을 조금씩 밝혀 천장의 나무 모양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낮의 사건을 곱씹었다. 그날의 일은 움푹, 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늪 같았다. 잘 되짚어 나가다가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장애물에 멈춰서야 했다. 동생을 절벽에서 잃었을 때는 슬펐고, 눈앞에 동생이 나타났을 때는 기뻤지만 역시 이상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애써 모른 척해도 보았지만 이미 풀린 생각들은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상이가 나를 제치고 집에 먼저 가 있을 수 있으리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물며 달리는 내내 본 움직이는 거라곤 그 검은 새밖에 없었는데. 두려운 마음에 차마 확인하지 못하고 멀어졌던, 숨 가쁘게 달리던 등 뒤의 절벽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쩌면 내 진짜 동생은 그때 그 절벽 아래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여기 있는 동생은 변장한 요괴 따위가 아닐까 하는 소름 돋고 유치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난 그때의 사고와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새근거리는 동생을 곁눈질로 살폈다. 흐린 얼굴이 보였다. 절벽. 요괴. 보고 있으니 어쩐지 몸이 떨렸다. 그땐 나도 어렸다. 귀신을 무서워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어버리기도 하는, 순진한 아이. 망상은 가짜였겠지만, 두려움은 진짜였고, 나는 그날 스스로 동생을 잃어버렸다.

무서운 이야기에 괴로워했던 어린 날의 자신을 순수했던 시절로 추억하며 웃어 보일 수 있는 어른들도, 그런 유치한 괴담에 여전히 작은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감정보다는 기억에, 기억보다는 습관에 가깝다. 내가 혼자 만들어 낸 그 괴담도 습관이 되어 나에게 남았다. 질긴 놈이다. 그날 이후로 수년이 흘렀건만 난 지금도 동생이 불편하다. 섬의 작은 분교는 중학생을 가르칠 수 없었기에, 나는 그해 겨울을 끝으로 섬을 나와 동생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형제의 어색함은 청소년기에 서로를 자주 보지 못한 탓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와 동생 사이 벌어진 틈의 기저에는 동생을 향한 그 웃기지도 않는 두려움이 깔려 있음을.

추위와의 힘겨루기가 더는 무리라고 느낀 나는 회상과 궁상을 접어두고 언덕을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안개 낀 숲길을 걸으면서도 그날의 사고를 생각했다. 정말 모처럼, 섬의 겨울을 겪고 있자니 그날의 강렬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섬 밖에서 직장을 다니던 나는 자리를 오래 비우지 못했다. 겨울이라고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될 리는 만무했고, 그렇기에 겨우내 꼼짝없이 고립되는 섬을 이 시기에 찾아올 수는 없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처음 시작한 일이 고향에서 겨울나기인 것도 그 때문이다. 출근 따위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자유의 증명이자, 오랜 사회생활로 더럽혀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단절된 공간으로의 방문. 고개를 흔들며, 기분을 자꾸만 이상하게 만드는 오래전 기억을 떨쳐내려 애쓴다. 지금 난 휴양을 위해 고향을 찾았다. 이제 편하게 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리라 다짐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검은 새가 지나간다. 짙은 안개도 새의 덩치를 가리지 못한다. 거대한 검은 새. 애써 밀어낸 기억이 다시 머리를 들이민다. 검은 새는 그날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어린 날의 과장된 기억쯤으로 여겼던 새다. 그 새가 눈앞을 지나갔다.

트라우마에 노출된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째서인지, 나는 이상한 새의 출현이 어릴 적 상상한 이야기가 진짜라는 증거일지 모른다고 느꼈다. 괜한 연상작용이라 다독이며 언덕을 찬찬히 내려가려 했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 섬의 별장쯤으로 쓰고 있는, 우리 가족의 낡은 집에 다다랐다. 방 안은 외출 전 때 둔 불 덕에 아직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훈기가 볼에 닿자 긴장이 풀려 마음도 다시 편안해졌다. 그 새를 이상하다고 여겼었지만, 안개 너머의 새가 얼마나 정확히 보였겠으며, 정확히 보았다 한들, 내가 세상의 모든 새를 다 아는 것도 아니기에, 새의 덩치가 조금 크다고 해서 호들갑 떨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위로를 늘어놓았다. 다 큰 어른이 새 한 마리에 그만큼이나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도 돌이켜보니 놀림감이었다.

집은 조용했다. 지는 해의 붉은 빛이 안개를 뚫고, 방 안까지 옅게나마 들어왔다. 뜨듯한 방바닥과 햇살은 집을 정겨움으로 채웠다. 나는 저녁밥을 준비해야 했으나 그 분위기에 취해, 귀찮다고 중얼거리며 드러누웠다. 천장을 본다. 생경하다고 생각한다. 거미줄에 먼지가 끼고, 판자 틈에는 흙인지 뭔지 모를 것이 뭉쳐 있었다. 저렇게 낡았었나. 몰랐네. 마지막 말을 반복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찰나,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렸다. 마당의 자갈을 밟는 소리가 분명했다. 대문을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결에 놓쳤나. 겨울의 빠른 일몰이 지나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무렵이다. 동네 분인가보다 싶었지만, 대문을 두드리거나 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마당에 인기척이 있으니 적잖이 불안했다. 하물며 해가 지고서 남의 집에 들를만한 사람은 동네에 없다. 여태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은 그 노인들도 지금쯤 이미 하루를 갈무리하는 와중일 터였다. 불안감이 들자 방 안에 여차하면 휘두를만한 무기가 보이는지 둘러보았다. 있는 거라곤 소설 몇 권에 좌식 책상, 탁상 등과 연필 몇 자루 그리고 옷가지뿐. 개중에 그나마 위협적으로 보이는, 휘두르기 좋은 소설책을 집어 들고 문을 연다. 차라리 좌식 책상을 냅다 들고 나가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너무 늦게 해버렸다. 책을 들고 뛰쳐나오는 나는 만만한 책벌레로 보였을 테다.

나는 마당에 펼쳐진 광경에 기시감을 느꼈다. 곧 그것이 절벽에서 회상하던 사건과 닮았음을 알았다. 눈앞에 상이가 수그리고 있다. 가방을 내리고 운동화를 벗고 있다. 마루 밑에 놓인 등산화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다. 요란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랐는지 상이는 고개를 들었고, 녀석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형, 형이 왜 여기 있어? 겨울이잖아. 회사는 어쩌고.

그날과 같다. 놀라야 할 사람은 이쪽이다. 그래, 겨울이잖아. 안개와 파도가 찾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잖아. 뱃길도 다 막혔어, 너는 어떻게 지금 섬에 나타난 거야. 회사를 그만뒀다는 소식마저 동생한테 알리지 않았을 정도로 내가 형제에게 소원했다는 사실이 순간 머리를 스쳤으나 지금은 다른 문제가 더 중요했다. 난 이번에도, 상황을 이해하기에 바빠 아무 말도 못 했다. 일단 겨울이 시작되면, 이 섬은 하늘을 통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나가지 못하며, 들어오지도 못한다. 한 가지, 상이가 내 앞에 서 있는 일이 말이 되는 경우가 있다. 녀석이 겨울이 오기 전에 이미 섬에 들어와서는, 어디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잘 숨어 지내다 이제야 집에 찾아왔다는 가설이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것도 이상한 점 투성이지만, 현재로선 기댈 수 있는 최선의 추리였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여기 있니. 아니,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난 방금 막 왔지. 동생은 당연하다는 듯 웃어 보이며 뻔뻔한 답을 내놓았다. 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공기가 차갑다. 어느새 날도 완전히 저물었다. 거친 파도 소리가 요란하다고 생각했다. 너는 왜 이런 식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리 천진하게 내뱉은들 그것이 갑자기 합당한 일이 되기라도 하는가. 치미는 짜증이 안개처럼 새어 나와 공기를 차갑게 적셨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듣고 싶었다. 난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이 무섭다. 자꾸만 이상한 일의 중심에 서는 동생이 무섭다. 그러나 일단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언제까지고 차갑게 버티고 설 순 없는 노릇이다. 어른답게, 감정을 추스르고 동생을 따뜻한 방으로 데려가야지. 나는 그렇게 나를 억눌렀다.

백 년 동안의 고독. 멋진 책이지. 다 읽었어? 아니면 읽는 중?

새 대화의 물꼬를 상이가 터주었다. 녀석은 내가 만지작거리는, 연장 삼아 들고나왔던 책을 쳐다보고 웃었다. 읽다가 말았다고, 다시 읽어볼 참이라고 답하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추우니 일단 들어가자 손짓했다. 넓던 방이 상이가 오자 꽉 찬다. 저녁은 섬에 챙겨온 간편 식품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우리는 어색한 기류 속에서 간신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방이 더 식기 전 불을 때야 했다. 상이가 아궁이에 가고 나서야 나는 숨을 돌렸다. 가게는 여전하다고, 아주 많이 벌지야 못해도 그냥저냥 큰 탈 없이 살고 있다고, 아니 여전히 혼자라고, 지금에 만족하려 애쓰는 중이라고, 나도 혼자라고,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당분간은 휴식이라고, 어떻게든 되겠지, 약간은 무책임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글을 써볼까 한다고, 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우리 사이에 오간 대화는 침묵 메꾸기용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따듯한 구석이 있었다.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을 내일로 미룬다. 상이 네가 여기 있을 수가 없다는 의문을 전제로 하는 그 질문은 떠올릴수록 오싹했다. 나와 한 방에 있는 존재의 정체는 날이 밝을 때 밝혀보아도 늦지 않겠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잠을 청한다.

뭐 하는 거니. 지금, 지금이 몇 시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상이를 불렀다. 잠이 덜 깨 머리가 멍했다. 문풍지 사이로 흐르는 은은한 빛이 알리는 것이 새벽인지, 한밤인지는 불분명했다. 나는 상이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았다. 아직 흐린 시야 앞에 Ⅳ를 가리키는 시침이 언뜻 보인다. 이른 기상이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 상이는 형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였겠지만, 혼자에 익숙한 내겐 조금의 인기척도 충분히 거슬렸다. 매년 겨울이면 아무래도 빈집이 걱정되더라고. 점검차 왔는데 형도 있겠다. 이번 겨울은 걱정 없다. 가서 가게나 열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상이는 문을 열었다. 가게 쉴 때 또 올게. 맛있는 것 좀 사서.

문지방을 타고 냉기가 넘어왔다. 자는 동안 한껏 이완된 근육 틈으로 추위가 송곳처럼 들어왔다. 이불을 걷어버리고 동생을 붙잡으러 일어나기까지는 그래서 큰 용기가 필요했다.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질문은 그 틈을 타 허무하게 흘러나왔다.

상이야. 너는 늘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대체 겨울에 어떻게 섬을 나간다는 거니. 애초에 어떻게 섬으로 들어왔니.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날, 넌 어떻게 집에 있었을까. 절벽에서 팔랑거리던 목도리는 뭐였을까. 혼자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난 네가 무서웠다. 아니 지금도 무섭다. 요괴 따위가 너로 변장한 것은 아닐는지. 내가 그런 유치한 망상에 겁을 집어먹었었다면, 너는 어떤 생각이 드니. 그 망상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고 하면, 너는 내가 어떻게 보이니. 상이야. 너와 나 사이 벌어지는 일들을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상이야, 난 네가 무섭다. 상이야, 넌 대체 뭐니. 넌 어떻게 여기 있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울상만은 아니면 좋겠다. 속마음을 밝히는 일은 역시 부끄럽구나. 그러나 가슴속에만 묻어두었던 생각을 기어코 뱉어내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나는 답을 들어야겠다. 눈썹을 구긴다. 힘이 들어간 표정으로 상이를 바라본다. 그 각오와는 별개로, 찬 바람에 몸이 떨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상이가 일단 옷을 제대로 입자고 한다. 같이 나가자고, 보여줄 게 있다고. ‘보여줄 것’이란 질문에 대한 답인가. 나는 주섬주섬 외출복을 찾아 입었다. 상이는 도로 문을 닫고 들어와 그런 나를 기다렸다.

그날은 나도 잊을 수 없어. 처음이었으니까. 가만히 앉아있던 상이가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내가 아니라 벽을 보고 있었다. 딱히 들을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닌가 보다. 그것은 독백이었다. 나는 한 명의 관객이 되어 숨을 죽이고 방금의 대사를 곱씹었다. 처음. 의미심장한 단어다. 이 순간이 한 권의 책이라면, 분명 어떤 마법적인 일이 그 단어 안에 담겨 있겠지.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놓여있다. 그런 간단한 환상의 해답을 바랄 수는 없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동생이 보여줄 것을 나는 영영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상이도 이를 아는 걸까. 녀석의 눈에 외로움이 어른거린다.

아직 해가 들지 않은 어두운 길을 둘이 걷는다. 여전히 안개만이 가득했다. 정처 없이 상이의 등 뒤를 따라가다 이내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부턴 잠깐 걸음을 빨리해 상이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공기는 차가우나 날카롭진 않았다. 상이처럼 과하게 챙겨 입을 필요가 있을까. 어디 혹한기 원정을 떠나는 모험가 차림이다. 털이 가득한 군밤 모자에 등산용 장갑. 그리고 고글. 역시 과하다. 모자 위에 얹어둔 고글은 어느 영화 속 전투기 조종사의 소품 같았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이런 거창한 것들을 마루에 벗어두고 있었지. 그래서, 숲에는 뭐하러 가니. 절벽으로 가는 거니. 묻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상이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언제나 조금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가니 웬 낯모를 남자가 서 있다. 자박거리는 소리만이 파도의 아우성과 섞여 섬에 퍼졌다.

어느덧 언덕 꼭대기의 공터에 다다랐다. 시들어 스러진 풀잎들이 바람에 아늘거린다. 아직 해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배를 정박해둔 섬이 있어. 상이가 갑자기 우리 둘 사이의 적막을 깨고는 말을 이었다. 사람이 찾지 않는 섬이니까. 날이 밝을 때 다녀도 들킬 염려는 없지. 거기다 그 섬도 이 절벽과 비슷한 지형이야. 딱 좋다고. 마지막 말과 함께 녀석은 잠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입가에 다시금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상이의 말에는 이번에도 중요한 맥락이 빠져 있었지만, 그것이 외려 좋았다. 진실을 밝히기 전, 말할 이도 들을 이도 잠깐의 유예가 필요했다.

할머니는 내 재주를 아셨을 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셨지.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알기까지 꽤 걸렸어. 내 재주가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섰고, 사람들은 그런 일을 절대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을 것이란 것 말이야. 깨닫기 전에는 할머니가 무서워서 그 약속을 지켰고, 이유를 알고 나서는 스스로 사렸지.

얘기를 시작하는 상이의 시선은 절벽 너머에 머물러 있었다. 여전히 어둡다. 우린 공터에 나란히 앉았다. 흙바닥은 서늘했다. 상이가 내 쪽으로 조금 돌아앉는다. 이해를 갈구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형, 정말 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확인하고 싶어. 난 정말 이상한 존재일까. 어제 형과 마주쳤을 때는 내심 기뻤어. 누군가에게 비밀을 밝혀야 한다면 형이 좋겠지. 유일한 가족이잖아. 난 형이 물어봐 주기를 바란 거야. 못 이기는 척 고백하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와 오늘 내가 한 말들을 어떻게 설명하겠어. 겨울에 이 섬을 들락거린다니. 계속 형에게 의심을 심었잖아. 다만 형이 지금보다 한참 전부터 내게 의문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날 말이야. 그날은 내 재주를 처음 알아낸 날이라 나한텐 꽤 특별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형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정말 날 괴물이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걱정하지 마, 적어도 형 동생은 맞으니까. 변장한 요괴 따위는 아니라고.

상이가 조금 웃는다. 문장 사이에 쉼도 두지 않고 바쁘게 모든 말을 꺼냈다. 외운 대본을 발표하는 학생 같았다. 어떻게 말을 전달할지 고민하느라 그렇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 녀석이 침을 삼키고, 소리 내어 숨을 내쉰다. 떨린다. 드디어 무언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는 깊은숨을 들이쉰다. 상이가 일어나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간다. 뒤로 돌아 나를 본다.

나는 하늘을 날아.

상이는 진지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상이가 이내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괜한 말을 했나 후회하고 있으려나. 빨리 무슨 반응을 보여줘야 할 텐데. 조금씩 해가 뜬다. 나는 할 말을 찾느라 애쓴다. 햇살이 바다에 닿는다. 모르겠다. 나는 네가 적어도 괴물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해야 하나. 네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걱정해야 하나. 차갑게 식은 바닷물이 햇살을 만나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네가 정말 ···난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긴 하네. 그러나 헛소리가 뭔들 못 하리. 미안하게도 난 너를 믿을 수가 없다. 조금 화가 난다. 이 모든 게 혹시 장난인가. 아무 말도 들려주지 못한다. 안개에 물안개가 스며들어 세상이 더욱 흐려진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리다 지쳤는지 상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형이 나를 바로 믿어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상이가 두 팔을 양옆으로 펼치더니 위아래로 흐느적거린다. 이런 웃긴 모양새로 사람이 난다는데 누가 그걸 쉽게 믿겠어. 나한테는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어도 말이야. 역시 형과 절벽까지 함께 오길 잘했어. 직접 보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할 줄 알았다고. 날도 밝아온다. 지금이 좋겠어.

상이가 하얘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군밤 모자의 귀마개를 단추로 연결한다. 모자를 흔들어 머리에 잘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어깨를 돌리고, 목을 풀어준다. 금방 또 올게. 맛있는 거 사서. 씩 웃으며 고글을 쓴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하늘을 난다니. 혹 절벽에 온 이유가. 불현듯 그 말이 불길한 은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상이야 너 설마. 일어나 상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상이는 망설임도 없이 절벽을 향해 내뛰었다. 순식간에 아래로 사라졌다. 난 이번에야말로 동생을 잃었나. 찰나의 상황 판단이 끝나고 비탄에 잠기려던 그때, 우스꽝스럽게 팔을 휘저으며 상이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딛고 있지 않았다. 상이가 정말로 하늘을 난다.

상이가 절벽 끝에 선 내 앞에 얼마간 체공하다 하늘 위로 미끄러지듯 펄럭이며 날아갔다. 이내 안개에 잠긴다. 검은 새. 내가 이미 몇 번, 하늘을 나는 상이를 본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상하리만치 큰 덩치의 검은 새는 안개와 구름에 묻힌 상이었다. 방금 나는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이었을까. 녀석이 내 벙찐 얼굴을 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한 달이 지났다. 상이는 그날 이후로 서너 번 더 섬에 왔다. 언제나 해 질 무렵에 마당으로 내려왔다. 올 때마다 고기며 군것질이며 맛있는 것들을 챙겨와서 좋았다. 간편 식품만으로 한 계절을 나겠다는 발상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우린 나눌 대화가 꽤 많았다. 그간 서로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각자의 인생을 서로 얼마나 몰랐는지. 형제라고 전부를 공유할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모르고 지내서야 점점 더 벌어지는 틈만이 남음을 우린 이미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상이는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생겨서인지 아주 신이 난 듯했다. 원체 천진한 녀석의 얼굴이 더더욱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 모든 관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사실 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게 있어 하늘을 나는 인간이란 그 전의 망상을 대체한 또 하나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모르겠다. 두 눈으로 직접 본 사건도, 이렇게 믿기 어려울 수가 있구나.

자신의 비밀스러운 재주를 할머니 이후로 처음 다른 사람에게 밝힌 상이는 그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건다. 그자가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굳게 믿고 있다. 그자가 진실을 확인한 뒤에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상이는 분명 많이 외로울 것이다. 나는 그래서 녀석에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런가 보다’ 정도로 단념해야 했다.

책을 읽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제나 쓰고 오던 두꺼운 모자는 어디 가고 가벼운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슬슬 날이 풀려서 말이야. 그런데 이쪽은 역시 아직 춥네. 귀가 시려. 자기 머리를 향해있는 내 시선을 눈치챈 상이가 명랑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뒤이어 자기가 뭘 가져왔는지 보라며 가방을 벗었다. 가방 안에는 빨간 봉지가 들어있었다. 미나리였다. 위쪽에서는 벌써 봄나물이 나오고 있어. 올해 봄은 북쪽에서 내려온다더라고. 서쪽에 질렸나 봐. 중간중간 인적 드문 산도 많으니 여기까지 오려면 일주일쯤 걸릴 거야. 뉴스에서도 그쯤이라 예보했어. 상이가 봄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미나리 향을 맡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준비해야지. 언제까지고 여기 머무를 순 없다. 조금만 더 지내며 봄이 오는 경색을 즐기다가, 뱃길이 열리는 대로 떠날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섬을 나서기 전에 꼭 보고 가야 할 게 있다. 나는 달력에서 다음 주 화요일을 찾아 동그라미 쳤다. 상이도 뉴스도 그날을 봄이 여기 닿는 날이라 예상한다.

놓치지 않으려면 그날 전후로 해서 더 자주 가봐야 해. 아침에 온다는 거야 언제나 그래왔으니 걱정 없지만, 날짜는 언제든 틀릴 수 있어. 워낙 변덕이 심하니까. 내 행동을 지켜보던 상이가 조언했다. 나는 일, 월, 수 그리고 목에도 작게 빨간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런 오지 마을이 아니고서야 봄의 방문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지. 도시에 살면서 그 풍경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니. 모처럼 여기 왔으니 꼭 보고 싶구나. 내 이야기에 상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비빈다. 어둠이 깔린 절벽 공터에 앉아있다. 벌써 나흘째다. 달력에 표시한 요일 중 어느덧 수요일까지 차례가 왔다. 전날은 모두 허탕이었다. 놓칠 바에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해도 뜨기 전에 절벽으로 왔다가 아쉽게 돌아간 것이 며칠째. 일출은 그만큼 자주 봤지만, 짙은 안개 뒤로 작은 빛만이 얼룩져 퍼질 뿐 그다지 멋진 광경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 기운에 몸을 움츠린다. 절벽 위에 가만히 앉아 추위를 타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괜한 짓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새해 첫날의 해돋이와 같다. 새벽에 이불에서 나올라치면 어차피 매일 뜨는 해를 구태여 챙겨 볼 필요 있나 싶다가도 그래도 새해인데, 하면서 억지로라도 보러 가는 그런 것 말이다. 이것도 매년 이맘때에만 잠깐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만 빼면, 그저 그런 자연 현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왕 고향에 와 있겠다. 어릴 적 추억을 살려 볼 생각으로 꾸준히 언덕을 올랐다.

날카롭던 파도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안개도 파도를 따라 점차 흩어졌다. 은밀히 시작된 그 변화를 알아챈 나는 서둘러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바람도 어느덧 조금씩 훈기를 띠었다. 두근거린다. 떠오르는 해 앞, 저 멀리 바다에서 용이 다가온다. 낮게 날아오는 걸 보아하니 역시 우리 섬에 가까이 다가올 생각이다. 도시에서 지낼 적엔 봄을 몰고 오는 저 용을 멀리서, 그나마도 아주 잠깐밖에 보지 못했다. 용은, 시끄럽고 더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는지, 도시를 지날 때면 하늘 높이서 최소한의 봄을 뿌리고는 바삐 날아갔다. 나는 그런 용을 건물 틈 사이로 목이 꺾이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곤 했다. 고향에서는 용이 가까이 다가와 줬는데, 숨길 수 없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새어 나왔다. 행여 용이 놀랄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용이 섬 주위를 맴돈다. 햇살에 비늘이 반짝인다. 먼 길 날아오느라 지쳤는지 근처에서 쉬다 갈 모양이다. 사람이 없거나, 있어도 얼마 되지 않는 오지를 만나면 용은 그곳에 잠시 머문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서 봄의 용을 구경한다. 아, 나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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