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자기를 넘어서면 대가(大家)가 되고 시인이 자기를 넘어서면 시승(詩僧)이 된다는 말이 있다. 시승이라는 말은 왠지 높아 보인다. 그 경지 속에서는 세속의 일들은 다 필연이 되며, 생활의 애처로움마저 숭고를 숨긴 생의 비밀로 연결되고 만다. 하지만 시의 이유는 믿음이 아니라 체험이라서, 우리는 시승이 아니라 시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씀에 동의’해서 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의 ‘체험에 공감’해서 울 수도 있다. 그것은 서로 때문에 우는 것이다. 연대는 그런 게 아닐까. 특히 좋은 응모작들이 많았던 이번 심사에서 각각의 작품들을 따라 읽으며 했던 고민이었다.

당연히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잘 말하는’ 작품과 ‘잘 완성된’ 작품보다는 ‘잘 느껴지는’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에 하나 더, ‘무엇을 다루는가’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는데 그 역시 자신의 ‘정직한 느낌’보다는 ‘올바른 생각’에 더 가깝다고 여겨지는 작품을 편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다 물리고 「쥐는 너야」를 당선작으로 「개기월식」을 가작으로 선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쥐는 너야」는 교육의 현실과 기계화의 모순, 그리고 전쟁의 이미지가 각자의 층위를 잘 지키며 이 시대의 슬픔을 중의적으로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중의적이라 함은 그것을 교육의 현실에 중심을 두고 읽어도 혹은 기계화나 전쟁에 초점을 잡아도 기어이 좋은 이미지로 그 비극을 마주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개기월식」은 개인의 비애가 한 세계를 전유하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비장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감각적 거리를 만들 줄 아는 수작이었다. 이들이 응모 시 첫 번째로 내세웠던 작품들도 좋았으나 자기 목소리가 커 독자의 자리가 비좁거나(「연서1-존재와 자연」) 감각적 이미지로만 연결되어 정황 파악이 쉽지 않았다(「점독」). 더 낮아지거나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는 독후감을 덧붙인다. 시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꼭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심사였다.

신용목 시인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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