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생을 만나다

1. 안진(사회·77)

2. 정해민(지역개발·77)

3. 김창길(농업경제·77)

4. 이재의(경제·75)

5. 정동년(화학·62)

6. 김태종(국어국문·76)

7. 전용호(경제·78)

8. 임희숙(음악교육·77)

9. 김상윤(국어국문·68)

10. 정경자(교육·78)

 

1980년 총학생회 일원으로 밤낮없이 뛰어다녀
광주에 함께 남지 못했다는 부채감과 후회
현재 5·18 조사위서 피해자 탄압 사건 규명

“광주에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믿었어야 했다. 지나가던 택시에서 복적생 선배가 피하라고 소리쳤을 때도, 오빠가 서울로 가 있으라고 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고 처음 생각했던 대로 움직여야 했다. 광주에서 벗어나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피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숨어다닐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정경자 씨(교육·78)는 5월 19일 서울에서 내려온 오빠와 오빠의 선배를 만났다. 약속대로 정 씨의 집에 놀러 온 것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변한 광주 상황에 정 씨의 오빠는 정 씨를 서울로 피신시켰다. 정 씨가 총학생회(총학)에서 일한 것이 정 씨의 신변에 위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광주의 상황을 다른 지역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오빠의 선배와 연인으로 위장한 5월 20일 광주를 벗어나 그의 오빠가 재학 중이던 서울대 농대가 위치한 수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정 씨는 한경호 목사에게 부탁해 사람들을 모으고 광주의 상황을 알렸다.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과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직된 상황 속에서 아무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전국이 굳어버린 분위기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광주에 남아 사람들과 함께 일했어야 했다는 후회의 눈물이었다.

밤낮없었던 총학생회실
당시 총학에서 일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 총학에 합류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화를 향해 걷다보니 자연스레 총학으로 모여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 씨도 민주화를 바라며 총학에서 일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서로 만나기 위해선 총학생회실에 모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고정된 회의 시간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그날 총학생회실에 있던 사람들이 해결했다. 그는 총학생회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당시 제작되던 성명서 등의 자료들을 모으는 일을 맡아서 했다.

“5월 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강섭 선배가 나를 따로 불러 양동시장에 가서 횃불에 사용할 솜을 구입하라고 시켰다. 결혼 이불을 만든다고 하며 솜을 사라고 했다.”

그렇게 산 다량의 솜을 자전거에 실어서 알려준 주소로 배달 보내는 것까지가 그의 일이었다. 언제든지 잡혀가 조사받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이 있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물어보지 않았다.

정 씨는 “당시에 모두가 사진 찍는 걸 피했지만, 양강섭 총무가 나에게 이것도 기록이니 사진을 찍자고 했다”고 사진을 찍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1980년 5월 3일, 반민족·반민주 세력 장례식에서 반민족·반민주 망령들을 관에 묻은 후 묘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제공=정경자 씨
정 씨는 “당시에 모두가 사진 찍는 걸 피했지만, 양강섭 총무가 나에게 이것도 기록이니 사진을 찍자고 했다”고 사진을 찍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1980년 5월 3일, 반민족·반민주 세력 장례식에서 반민족·반민주 망령들을 관에 묻은 후 묘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정경자 제공

그는 5월 3일 반민족·반민주 세력 장례식에서 연대시를 낭송했다. 박관현 회장의 성명서 낭독 다음 순서였다. 이는 반민족·반민주 망령들을 관에 묻고 묘비를 세우며, 총학이 학내 민주화와 더불어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 날이었다. 정 씨는 “총학으로서 바쁘게 일하느라 준비도 못한 채 나가서 시를 읽었다”며 “시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같이 낭독했던 송선태 선배가 나중에 그 시가 김남주 시인의 시였다고 말해줬다”고 말했다.

1980년 봄 이전까지 학내 분위기는 삼엄했다. 1978년 교육지표 사건 이후 시위에 모인 사람의 수가 100명이 되지 않았던 것을 그는 기억했다. 외로운 투쟁의 길이었다. 1980년 봄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억눌렸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중앙도서관 앞 거리를 가득 채운 반민족·반민주 세력 장례 행렬을 언급하며 그는 “자리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전국지명수배명단에 인쇄된 ‘나의 얼굴’
“5월 18일 이후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다. 책임지지도 못하고, 도망만 다니며 신세 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동안 자신을 숨겨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다. 한경호 목사 집에서 나온 그는 잡히지 않기 위해 방을 옮겨 다녔다. 유인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싶었지만, 작업할 인쇄소도 돈도 없는 상황이었다.

6월 1일, 합동수사단이 그가 있던 방에 들이닥쳤다. 군화를 신고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방을 뒤엎고 그를 포송해 중곡동 파출소로 갔다. 그의 도피를 도운 오빠 선배를 용의자로 의심해 정 씨도 함께 잡힌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았더니 뺨을 때리며 의자를 걷어찼다”며 조롱조로 선배의 애인이냐고 물었을 때의 모욕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날 풀려나면서 예비 검속자 명단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6월 말경, 화순에 있는 작은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화순경찰서에서 정 씨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자신을 향한 수배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수원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전국지명수배명단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도망을 다녔지만 돈도 없고, 연락할 사람도 없어 의식주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1981년 2월, 도망 다니던 정 씨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갔더니 아버지가 지금이 자수할 때라고 했다”며 “아버지와 같이 서부경찰서에 갔다”고 말했다.

경찰서에 들어서자 그를 향한 욕설이 들려왔다. 그렇게 서부경찰서 보호실로 보내졌다. 그는 보호실을 두고 “인간이 있을 수 없는 짐승 소굴과 같은 공간”이라 묘사했다. 4평 남짓에 푸세식 화장실이 바로 옆에 있었으며 앉을 자리도 부족했다. 보호실에서 이유 모를 하혈이 시작되고 피가 굳어 빳빳해진 바지 솔기 부분이 피부에 닿아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똑바로 앉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쪽으로만 기대고 있으니 왼쪽에 마비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정 씨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에 관해 “내 고통은 광주 시민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전했다. 그는 보호실에서 유치장으로 이감된 뒤 밖으로 나왔다.

광주 기차역에서 한 약속
정 씨는 1980년 5월 20일, 광주를 벗어나기 전 기차역에서 만난 우리 대학 학생과 ‘각자의 자리에서 광주의 상황 알리자’고 약속했다. 그는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정 씨는 5월민중항쟁(5·18)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교사를 그만두고,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10년 이상 일했다. 광주 시민에게 빚진 마음을 갚기 위해 5·18의 가치와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2021년 11월부터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5·18 피해자라는 이유로 국가 권력으로부터 탄압받은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이 기사를 끝으로 10회 간 연재한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생을 만나다’ 기획을 끝맺습니다. 1980년 5월 당시의 상황을 어렵지만 생생히 전해준 10명의 주인공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 인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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