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학생수습위원회 총무로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광주5월민중항쟁, 인생 지나가는 과정 중 하나"

<전대신문>이 전남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1980년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생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과 설립 34주년을 맞이한 ‘한국현대사회연구소(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이끈 고(故)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구술 채록된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

"그게 좀 이상해. 내가 살려면 여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 운 없으면 죽는 것이고 운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살아남는 것이지. 도망가고 싶지 않더라고."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끌려가기 전까지 도청에서 민주화를 위해 버틴 정해민 씨(지역개발·77)의 말이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충장로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저격해 총 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 학생들을 모아 도청에서 임시학생수습위원회 총무로 일했다.

시민의 외침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인식 전환
"너 같은 후배를 둔 게 창피하다. 사상이 없는 애는 네가 처음이다." 그의 고등학교 선배였던 박관현 당시 학생회장이 그에게 한 말이다.

1980년 5월 16일 저녁, 5·16 군사 쿠데타를 규탄하는 횃불 시위에 그는 반강제로 참여했다. 그는 바둑 서클 오로회 회장으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그와 오로회 회원들은 학생회의 부탁으로 횃불 시위에 동참했다. 학생 민주화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예상한 것과 달리 시민들은 박수치며 "이제 우리나라에는 학생들밖에 없다"고 외쳤다. 그날의 경험은 그가 정의로운 사회를 좇게 했다.

전남대 정문, 시내보다 분위기 살벌
18일, 시내에서 학교로 향하는 그에게 한 주민은 "아침에 학교에서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맞고 끌려갔으니 학교로 가지 말라"고 말했다. 계엄군의 시선을 피해 학교에 들어간 그는 제1학생회관 앞에서 한 계엄군을 만났다. 계엄군은 그에게 "학생들은 학교에 있으면 다 잡혀가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당시 전남대의 분위기는 시내보다 살벌했다. 19일, 그의 부모님은 그를 외갓집인 보성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보성으로 가지 않고 화순에서 광주로 돌아왔다. 혼자만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같이 탄 승객들이 그를 숨겨줘야 했을 만큼 군인들은 버스 안까지 들어와 학생들을 잡아가려 했다.

시민 저격하는 계엄군 목도
21일, 그는 아침 일찍 도청으로 나섰다. 도청 앞 분수대를 기준으로 시민들과 군인들이 10m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그는 "이틀 동안 찌르고 죽여도 시민들이 도망가지 않고 버티니까 군인들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며 ”그렇게 대치가 이어졌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시민들이 군인과 대치하고 있을 때 화염병을 든 사람들이 전일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언론사는 다 거짓말한다"며 전일빌딩 안에 있던 당시 전남일보사(현 광주일보)를 태우려고 했다. 그는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막아서고 "광주일보만큼은 안 된다"며 "향토기업을 태우면 다른 사람들이 광주를 진짜 폭도라고 생각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러갔다. 그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셔터를 내리고 전일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셔터 내리고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있었던 곳을 군인들이 사격했다. 그는 "하마터면 나도 그날 죽었을 것"이라며 "그때부터 군인들은 시민들을 저격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시 전일빌딩 8층에 있는 전일방송국에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숨어 상황을 보고 날이 어두워진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잊을 수 없는 22일 저녁
5월 22일, 그는 도청 앞 분수 근처에서 아들이 죽은 이야기, 죽은 시민의 시신을 공수부대가 끌고 갔다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는 "의협심에 민주화 운동에 발을 들였다가 도망치는 비겁자가 되기 싫어 끝까지 남은 것"이라며 "학생들은 일만 벌여놓고 도망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광주는 경찰은 물론 봉사할 사람조차 없었다. 그는 봉사할 학생들을 찾기 위해 "학생들은 모입시다"라는 팻말을 들고 충장로 일대를 돌았다.

잠시 후 도청 1층 회의실에는 70명 정도의 학생들, 송기숙 교수와 명노근 교수가 모였다. 그는 그들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간 후부터 27일 새벽까지 임시학생수습위원회 총무로 일했다. 그는 죽은 사람들을 입관 후 배치, 외곽에 있는 계엄군 소식을 보고받는 일을 했다.

“계엄군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수류탄 던져, 방에 있던 사람들 다 죽어”
"시민군들은 다 총을 쥐고 있었지만, 총을 쏴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불안해서 무언가 어른거리기만 해도 총을 쐈다. 12시부터 2시간 동안 총소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사방에서 총을 쏘니까 극심한 공포가 몰려왔다."

26일 밤 11시, 그는 상황실에서 한 시간 내 광주로 탱크가 몰려올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그는 "나도 인간이라 살고 싶어 자리를 벗어날까 갈등했다"고 말했다. 줄어들지 않는 총소리에 그는 당시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 씨를 2층으로 불렀다. 상황을 묻는 그에게 박 씨는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왔을 거라고 예상하지만 눈에는 안 보인다"고 전했다. 그는 박 씨에게 "지금 총을 쏘는 건 다 불안한 심리 때문"이라며 "아침만 되면 학살은 못 할 것이니 아침까지는 버텨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박 씨와 도청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지 말라고 외쳤다. 돌아다니던 그들이 코너를 도는 순간, 계엄군이 그들을 잡았고 이후 상무대로 끌려가게 됐다. 그는 "계엄군들이 방에 누가 있든지 없든지 수류탄을 까고 들어가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며 "같이 방에 있었던 원광대생이 죽은 걸 나중에 전해 듣고 많이 울었다"고 이야기했다.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못 해, 조사 없이 두들겨 맞기만"
“고문당한 기억은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아픔과 쓰라림만 남아있다. 나한테 좋았던 건 하나도 없었다. 이후에도 그쪽은 가기도 싫었다.”

그는 5월 27일 상무대로 잡혀 들어간 후 맞기만 했다.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며 "희망 없이 죽을 날짜를 받아놓은 사람이었다"고 당시 심정을 고백했다. 그를 조사했던 당시 보안 상사 조명윤 씨가 그에게 “너는 못 나가고 나머지는 어차피 다 나간다"며 "따뜻하게 말하면 부모들이 봉투를 주니 이참에 한몫 잡으란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250명이 한 방에 갇혀 지내며 목욕도 하지 못해, 늘 냄새가 났다"고 갇혀 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5월 27일 상무대에 잡혀 들어간 후 3개월 뒤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2월 27일 출감했다.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은 거 같은 죄책감 견딜 수 없었어"
"5·18민주화운동이 재평가된 후에도 도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고 싶다는 지인의 부탁으로 40년 만에 도청을 찾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괜찮을 줄 알았던 그는 자신이 일했던 2층 방에 들어가자마자 통곡했다. "내가 잘못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버렸다는 생각에 못 견디겠더라"고 당시 마음을 전했다.

그는 광주5월민중항쟁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인생에서 거쳐 가는 과정에 하나일 뿐이다"며 “5·18로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남대학교가 "삶의 황금기이자 꿈과 낭만이었다"며 "전남대학교가 불의를 참지 않는 대학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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