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생애 마지막 인터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주범으로 몰려 사형 선고
석방 후 5·18 진상규명 위해 힘써

<전대신문>이 전남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1980년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생의 이야기를 전한다. 고(故)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구술 채록된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지난달 27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대신문>과의 인터뷰가 광주 5월의 정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일한 고인의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5·18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5·18 이전에도 학생 운동을 했지만 그건 아마추어적인 운동이었다. 5·18 이후 내 죄명이 내란 수괴였다. 5·18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였다. 그래서 5·18의 진상규명을 위해 앞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피해 당사자들, 유족들과 ‘광주 전남 구속자 협의회’를 만들어 대정부 투쟁을 했다."

당시 군부의 억압으로 진실을 위해 싸울 사람이 없었다는 정동년 씨(화학·62)는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이후 광주5월민중항쟁(5·18) 가족들과 5월 진상규명, 대정부 투쟁을 위해 힘썼다. 2021년 5월부터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5·18 진상규명을 위해 일했다.

학생 운동으로 인한 제적

정 이사장은 1964년도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항쟁에 동참했다. 농성으로 인해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당시 그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배후 조종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스스로 판단해 결정했는데 수사 당국에서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일이라며 몰아붙였다. 언론사에서는 시위하는 학생들을 일부 ‘극렬 학생’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학생 운동이 폄하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총학생회장이 되면 공식 기구인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이름으로 시위할 수 있으니, 수사 당국도 일부 극렬분자들이 사주한 시위라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64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총학생회장이 된 그는 시위를 준비했다. 대학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리 가라앉아 있어서 시위를 하면 학내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31 데모로 그는 제적됐다. 제적된 후 복학이 되지 않아 1년 동안 서울에 머물며 복학 운동을 하기도 했다. 1년 동안 국회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80년 복학하기 전까지 그는 공장에서 일하고 기술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는 등 생계를 이어나갔다.

복학 후 민주화 운동 참여

1980년 전국 대학 제적생들이 정부에 의해 복학했다. 우리 대학 복학생들은 복학생협의회를 만들어 학내에 쌓여 있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어용 교수 퇴진 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그들이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그는 학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이유로 학내 문제가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후 그들은 학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 투쟁으로 구호를 바꾸어 운동을 이어갔다.

“1980년은 민주화 봄의 시작이었다. 전국 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거리엔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설렘이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은 전두환 군부 일당이 정권을 찬탈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거리로 나가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사흘 동안 이어진 민족민주화대성회의 시작을 떠올렸다.

17일 밤 예비검속

"합동수사단에게 2시간 동안 두들겨 맞았다. 원하는 진술을 받기 위해 기를 죽이고 밤에 진술하게 한 것이다. 잡혀 들어간 후 2일 정도는 가둬 놓기만 하고 조사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때 5월 항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갇혀 있어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예비검속으로 보안대 지하실에 잡혀 들어가 5·18 당시 상황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이야기했다.

민족민주화대성회가 끝난 후 집에 있던 그에게 5월 17일 밤, 합동수사단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민족민주화대성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보안대 지하실로 잡혀 들어가서 조사받기 시작했다. 그때 5·18이 진행된 것이다. 지하실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18일 아침, 그는 지하실 밖 상황이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하실 위로 들리는 당황해하는 구둣발 소리를 통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다. 다시 휴교령이 내리면 도청 앞에 집결하자는 선언을 하고 해산했기 때문에 다시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잡혀 들어간 지 3일 정도 지난 후 군인들은 지하실 독방에 있던 사람들을 2층 강당에 모았다. 그제야 그는 같이 연행되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인원은 10명 정도였는데, 10명 모두 복학생이었다. 이후 복학생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잡혀 들어온 사람들을 통해 5·18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5·18 내란 수괴로 몰려

1980년 복학 후 5·18 내란 수괴 혐의로 수감된 그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도소 생활을 했다. 5·18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관계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체포한 것이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두환 군부가 사상자가 몇천 명이 넘게 나온 5·18을 덮기 위해 내가 김대중 씨에게 돈을 받아서 일한 것이라고 상황을 만든 것이다. 책임을 나에게 둘러씌워서 김대중이라는 정적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전두환 군부가 내란죄로 많은 사람을 잡아 들인 이유를 위와 같이 설명했다. 내란 수괴 혐의로 교도소 생활을 하던 그는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그는 1992년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1999년 광주광역시 남구청장, 2019년 전남대학교 민주동우회 회장으로 일했다. 작년 5월 5·18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취임, 올해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며 5·18의 진상규명과 5·18기념사업을 이끌었다.

오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 이사장은  5·18이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언급하며 "가치관이나 사회를 보는 눈, 사회적 계층이 다르기 때문에 5월 가족 간에도 갈등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5·18의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5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들과 함께 노력했다.

그는 "5·18에 관해 정치권 내에서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헬기 사격을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지, 발포 명령을 한 사람은 누구인지, 사상자는 정확하게 몇 명인지 등 5·18에 관해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는 사실에 통탄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가 증언을 수집하고 당시 상황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면서도 "국민의 마음속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상규명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정 이사장은 "끊임없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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