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동참
“항쟁 마지막 지킨 사람 기억해야”

<전대신문>이 전남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1980년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학생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과 설립 34주년을 맞이한 ‘한국현대사회연구소(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이끈 고(故)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구술 채록된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

“아버지도 그 모양인데 너도 학생 운동한다고 뛰어다니냐.”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에 동참했던 안진오 교수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당시 문리대 학장 정득규 교수에게 들은 말이다. 모욕적인 발언들은 그녀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이런 낙인 때문에 대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하고 싶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는 안진(사회·77) 교수. 1980년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우리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안진 교수를 만났다.

민주화에 눈 뜨다
미국의 여성 저널리스트를 보며 저널리스트의 꿈을 가졌던 안 교수가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대학 신문 기자였다. 그녀는 <전대신문> 기자로 일하며 자유가 보장되는 열린 언론을 꿈꿨다.

안 교수는 전남여고 출신인 선배들과 함께한 독서 클럽에서 실존주의 문학 작품과 역사책을 읽으며 민주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녀는 학생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학교 내에 국가 중앙정보부, 사법 경찰들이 정보 요원으로 근무했던 것을 언급하며 위압적이었던 당시 학교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로 인해 교수들은 자유롭게 말할 수 없고, 학생들은 억압된 수업을 들었다. 안 교수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재 치하에서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는 잘못된 한국 사회를 바꿔야지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시대를 회상했다. 이후 안 교수는 <전대신문>을 그만두었다.

“노동운동과 학생 민주화 운동은 함께 가는 것”
안 교수는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전남여고 동창 이경옥 씨를 통해 들불야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야학 활동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들불야학 신영일 씨의 부탁으로 ‘광주공단 실태조사’에 참여했다. 그녀는 “노동운동과 학생 민주화 운동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광주공단 실태조사에 동참한 이유를 설명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불온시했던 시대, 기초 자료를 수집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장에 가 노동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리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공단 길목에 서 있다가 밤늦게 퇴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설문을 받았다. 300여 개의 자료를 약 66일 동안 분석했다. 조사 결과 약 4분의 1의 노동자들이 한 달에 3만 5천원의 임금을 받았다. 안 교수가 <전대신문> 활동 당시 받은 원고료가 5만원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광주의 노동 환경은 평균 임금도 받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다.

안 교수는 조사 보고서를 4회로 기획해, 당시 <전대신문> 편집장이던 임주형 씨의 도움으로 <전대신문>에 연재했다. 첫 번째 기사는 1979년 5월 3일, 두 번째 기사는 1979년 5월 10일 자 신문에 실렸다. 두 번째 기사가 나간 후 <전남일보>에서 해당 기사를 인용했다. 이후 조사 결과가 밖에 알려지면서 중앙정보부는 <전대신문> 주간 교수와 지도 교수를 압박했다. 중앙정보부의 압박으로 연재는 중단되고, 노동청 기초 자료 수집을 위해 지도 교수로 이름이 올라간 당시 사회학과 박상태 교수는 신뢰하던 학생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사건으로 교수를 바로 해직시켜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언급하며 “당시에 놀랐을 박상태 교수님께 평생 죄스러운 마음이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1980년 5월 18일, 직전과 직후
“학교 안에서부터 도청 앞까지 가는 시위였다. 교수님들이 조직적으로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갔다. 15일은 교육지표 사건의 뜻을 대표해 지식인으로서 교수, 학생, 대학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시민들이 나와서 박수치고 호응했던 기억이 난다. 광주 시민이 연대하는 과정에서 5월 18일 공수부대에 저항하는 힘이 나온 거 같다.”

안 교수는 5월 15일 전부터 시민들과 함께했던 민족민주화대성회를 떠올렸다. 그녀는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을 회상하며 박정희 허수아비를 도청 앞에서 태우는 횃불 시위에 동참했다. 횃불 시위는 도청에서 산수동 오거리, 계림초등학교, 충장로로 이어졌다.

“학생회가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것은 4월 9일부터 5월 17일까지다. 예비검속으로 학생회 간부들이 끌려갔다. 그런데 왜 나도 예비검속 대상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안 교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예비검속 대상이었고, 5월 17일 그녀 집 앞에 차가 들이닥쳤다. 그 시각 안 교수는 학생회실에 있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집에 없다고 둘러댔다. 소식을 들은 안 교수는 날이 밝자 법원 뒤 이모 집으로 피신했다.

5월 18일 1시, 안 교수는 변장 후 이모의 감시를 피해 충장로로 향했다. 공수부대는 아직 도청 앞으로 나오지 않았고, 시민들은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상황을 확인한 안 교수는 이모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자에게 부탁해 5월 19일 아침, 그녀를 이모 집에서 영산포에 있는 제자 집으로 피신시켰다. 안 교수는 23일부터는 집과 연락이 완전히 끊긴 채로 9월까지 영산포에 숨어 있었다.

광주5월민중항쟁이 남긴 것
“마지막 순간까지 버텼던 사람들을 보며 우리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나 돌아본다. 교육지표 사건으로 해직됐던 교수님들, 교수님들을 지키고자 했던 학생들처럼 운동했던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지난 분노들이 헛되지 않게 마지막까지 버텼던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기억해야 한다.”

안 교수에게 광주5월민중항쟁 이후 80년대는 혼돈이었다. 그녀가 영산포에 숨어 있을 때 무기고를 털어 군가를 부르며 영산포역을 지나간 시위대들은 민족민주화대성회 때 학생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에게 광주5월민중항쟁은 역사적인 부채 의식뿐 아니라 패배 의식을 남겼다.

광주5월민중항쟁 이후 안 교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를 겪지 않았다면 대학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 같다는 그녀에게 전남대는 자신의 알을 깰 수 있게 해준 곳, 권위주의 체제의 기계적인 공교육 속에서 세상을 보게 해준 곳이다. 그녀는 자신이 전남대를 통해 깨어났듯, 다른 사람에게도 전남대가 그런 곳이 되길 바라고 있다. 70주년을 맞이한 전남대에 안 교수는 “인권의 가치를 생각하고, 연대의 중요성과 성찰하고 비판하는 이성을 갖게 하는 지식 전당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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