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소리 새나갈까 이불 걸어두고 노래
“민주화 위해 일한 여성의 이야기, 기록되지 않아 안타까워”

“같이 활동했던 사람의 절반이 여자였다. 지금 생각해도 남자들 이름은 떠오르는데 여자들의 이름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5·18 당시 활동했던 여성의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 안타깝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바깥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떠나간다. 가정생활은 다음 세대를 이어가기 위해서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에서 당시 활동했던 여성의 목소리가 기록되지 않아 속상하다.”

임희숙 씨(음악교육·77)는 우리 대학 연극반, 탈춤반, 국악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단한 극단 '광대'에서 마당극을 공연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5·18민중항쟁(5·18) 중에는 유인물과 대자보를 제작해 배포하고, 도청 앞 분수대에서 군중 집회를 주관하는데 동참했다. 1982년 4월 박기순·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을 극화한 노래굿 '넋풀이-빛의 결혼식' 테이프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4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퇴직 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를 준비하고 있다.

“유인물과 주먹밥 만들어 도청에 전달”
“종이를 밀어서 복사하는 등사기로 대자보를 YWCA 관사에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유인물과 주먹밥을 도청에 전달해주기 위해 YWCA와 도청을 오갔다. 버스를 타고 유인물을 배부하거나, 분수대에서 집회를 주도하며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를 낭독하기도 했다.”

극단 광대의 창단 공연이 끝나고 다음 작품 연습을 위해 5월 18일, 전일빌딩 뒤에 있던 YWCA로 향했던 그는 그곳에서 계엄군이 학원가의 학생들과 시민들을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날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고 YWCA 관사에서 대자보와 주먹밥을 만들어, 도청에 전달했다. 국악반 회장이었던 그는 일할 사람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악반 후배들을 불러 같이 일했다. 그는 버스를 타고 상가, 광주 외곽을 돌며 구호를 외치고 '우리들은 정의파다'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치약과 물, 주먹밥을 만들어서 버스로 올려줬다.

그 모습을 발견한 그의 친척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러한 소식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집에 끌려갔다.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오기 바로 전날이었다.

두려움으로 지새운 날들
계엄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그는 자신이 같이 일하자고 불렀던 국악반 후배들이 걱정됐다. 그는 “아들의 행방을 알지 못해 불안했던 후배의 어머니가 찾아와 네가 불러내서 내 아들은 잡혀갔는데 너는 왜 안 잡혀가고 있냐고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의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같이 기다려보자고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누가 잡혀갔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두려운 감정만 커졌다. 극단 사람들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다들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는 전라북도 삼촌 집과 성당으로 옮겨 다니며 몸을 숨겼다.

데모 노래 개사해 가르치다, 유치장으로
“'우리들은 정의파다' 노래를 개사해 한 시간 동안 학생들과 함께 불렀다. 아이들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에 갔고, 이를 들은 주민이 데모 때 불렀던 노래를 학생들이 불렀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1980년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던 그는 교육 실습을 위해 6월 말 광주에 왔다. 평동중학교에서 실습을 시작한 지 5일째 되던 날, 7명의 교육 실습생이 잠시 학생들을 맡게 됐다. 그는 교실로 들어가 항쟁 당시 불렀던 노래를 개사해서 학생들과 함께 불렀다. 학생들이 개사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주민이 듣고, 데모 때 불렀던 노래라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학교로 찾아와 교사와 학생을 상대로 수사가 진행됐다.

교실에서 노래를 가르친 7월 4일, 그날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친상 중인 그의 집으로 음악과 지도 교수와 경찰이 찾아와 학생들에게 왜 그런 노래를 가르쳤냐고 물었다. 그는 “아이들의 흥미를 돕기 위해서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는 개사한 노래를 가르친 일이 잘못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광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된 그는 5·18이 아닌 실습 학교에서의 일임에 안도하면서도, 고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유치장에 갇히게 됐다. 광산경찰서 유치장은 여자들만 모인 곳이었다. 반원 형태로 생긴 유치장에 들어서자 조아라 회장, YWCA 간사 등 도청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치장에 들어간 다음 날 아침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그를 담당했던 형사는 그에게 항쟁 기간 당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그가 맞는지 계속 추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주인 상황이었고, 그전 활동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4일 만에 훈방되었다”며 “지도 교수, 사범대학 학장, 평동중학교 교장이 다신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쓴 서약서가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고 자신이 풀려난 상황에 대해 말했다.

오월을 기억하기 위해 부른 님을 위한 행진곡
‘님을 위한 행진곡’이 수록된 '넋풀이-빛의 결혼식' 테이프 제작을 위해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1982년 4월 주말, 황석영 작가의 집에 모였다. 이는 박기순·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의 넋을 기리고, 5·18의 진실을 널리 알리려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황석영 작가와 김종률 씨 등 여러 사람이 공동 제작한 악보와 대본을 가지고 코드에 맞춰 기타를 치며 연습을 시작했다. 바닥에 앉아 악보를 보며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이불을 커튼처럼 걸어두고 녹음했다. 이는 복사되어 다른 지역에서 민주화를 기억하기 위해 쓰여졌다. 여기서 그는 ‘무등산 자장가’ '무당 초혼 굿 사설'을 노래했고, ‘님을 위한 행진곡’ ‘에루화 에루얼싸’의 합창과 장구 반주를 했다. 녹음할 당시, 그에게 이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기회였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불탔던 시기 함께해 가슴에 남아”
“결혼하고 10년간 이사를 10번도 넘게 해서 주민등록초본이 뒷장을 넘어갈 정도였다. 결혼할 때 했던 반지와 가지고 있던 피아노 같은 건 진작 팔아 생활에 보탰다. 힘든 순간마다 그때 광대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의 결혼식이 광주의 명동성당위장결혼식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5·18이 일어나기 전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되었던 배우자의 영향이었다. 그가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남편에 대한 감시가 계속되었다.

“5·18 이후에 생활이 힘들어서 그 당시를 후회하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불타올랐던 시기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기록에 남을만한 큰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게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어린 시절 자라온 환경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길이었지만, 5·18은 나의 삶에 분기점이 되었다"며 "사회와 문화, 자유와 평화에 대한 넓은 인식을 키워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