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인력에도 포기 않고 26일까지 일했다”
시민 희생 막기 위해 노력

“5·18이라는 꼬리표가 인생에 계속 따라다녔다. 같이 항쟁했던 우리 5·18 동지들도 다 마찬가지일 거다. 5·18뿐만 아니라 목포 사람이라는 게 회사에 알려지고 난 후 회사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광주5월민중항쟁(5·18)에 참여했다는 이유, 호남 사람이라는 이유로 대학 졸업 후 당시 서울에 있었던 농수산물유통공사에서 승진이 밀리는 차별을 겪고 7년간 일했던 회사를 그만뒀다. 5·18 당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창길 씨(농업경제·77)의 이야기다. 그는 현재 목포에서 바닷모래 채취 사업을 하고 있다.

혼란 속 학생수습대책위원장으로 역할
광주 집과 도청 사이의 거리는 500m. “집에 있어도 창문으로 도청이 보였다. 도청에서 총알도 날아왔다. 옆 건물 세탁소 하는 사람 허벅지에 총알이 관통해 옆에 가서 치료해줬다.”

5월 15일 횃불 시위가 끝난 후 목포로 내려갔던 18일, 김 씨는 광주 상황을 알게 됐다. 19일 아침, 광주에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당시 대인동 터미널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동명동이었던 집으로 갔다.

5월 22일, 창문을 통해 도청에서 계엄군이 철수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 근처는 시민들로 붐볐다. 무질서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에 있던 학생들과 대화하며 일을 찾던 그에게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 장휴동 씨는 계엄사에 회담을 가는데, 학생대표가 필요하다며 그에게 임시학생대표로 가서 요구 사항을 전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학생대표로 계엄사에 가서 ‘사태 수습 전에 군경을 투입하지 말라, 연행자 전원 석방하라,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라, 사후 보복을 금지하라’ 등 7개 항을 설명했다.

이후 분수대 앞에서 열리는 궐기대회에 참석해 회담 경과를 보고했다. 궐기대회가 끝난 후 도청에 임시학생수습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송기숙 교수와 명노근 교수의 추천으로 그는 임시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23일 아침, 전날 20명이었던 수습위원 중 5명만 도청에 남았다. 그는 “송 교수님에게 일할 사람도 없는 상태로 일할 수 없으니 그만두겠다고 말했다”며 “학생회가 일할 수 있게 학생회 간부들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송 교수님은 임시가 아닌 학생수습대책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학생회 간부가 나타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5·18 당시 장례 준비, 도청 경비, 각종 무기 통제 등의 일을 했다.

“더 많은 희생이 있어선 안 된다. 나갈 사람은 가라”
“수습을 목표로 무기를 도청에 모았다. 광주는 이미 고립된 상태였고, 시민군과 군인들의 전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것에 찬성하기 어려웠다.”

26일 저녁 조아라 여사, 이애신 YWCA 총무, 윤공희 대주교 등이 참석한 최종 회의를 통해 무기를 버리고 수습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도청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그는 황금선 당시 부위원장과 노순암 씨와 돌아다니며 도청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 0시가 지나면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하며 “도청에 남는 것이 자신의 소신이 아니라면 피신해라. 무엇보다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다. 도청에 남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나가지 않았다. 김 씨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였다”고 회상했다. 26일 밤 11시,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5일 동안 했던 일은 사람 살리자고 시작한 수습이었다”며 “많은 사람의 희생이 아직도 아프게 마음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자수, 계엄사에 끌려가
27일 오후 1시, 전날 김 씨의 말을 듣고 도청에서 나온 7명이 도청 근처 식당에 숨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숨어있는 식당 주인이 불안해하며 나가라고 한 걸 전하며 자수를 해야겠으니 도와주라고 했다. 그가 25일 밤 보안사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당시 김기석 부사령관이 만약 수습한 사람들이 체포되더라도 그들을 위한 방면을 찾겠다고 말한 것을 그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오후 2시경 그는 도청에 있는 군인에게 7명이 자수를 원한다고 전했고 그 길로 그와 7명이 체포됐다. 그는 “보안사와의 통화 내용 때문에 자수했는데 알고 보니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5·18 정신, 훼손되지 않길”
“5·18로 짊어진 고난의 무게는 무게로 잴 수 없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5·18 동지들 거의 다 그렇다.”

김 씨는 자신의 실수가 사회에서 5·18 전체로 일반화될 수 있어 늘 조심했다. 그는 “자식들 결혼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며 “5·18 정신이 훼손되지 않길 바란다”고 전했다. 덧붙여 “전남대에 다니지 않았으면 5·18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전남대가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대학,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대학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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