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기대회 사회 보며 광주 시민의 목소리 가까이 느껴
극단 ‘광대’ 창립해 예술 통한 민주화 위해 노력
"5ㆍ18 이야기 더 풍부하게 조사해야"

 

<전대신문>이 전남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1980년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학생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과 설립 34주년을 맞이한 ‘한국현대사회연구소(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이끈 고(故)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구술 채록된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

“5·18이라는 것이 꼭 무장 항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주먹밥을 만든다며 쌀이나 반찬을 걷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리어카에 싣고 도청으로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대학생들은 홍보활동을 하고, 남고생들은 거리 청소, 여고생들은 취사 일을 했다.”

5월민중항쟁(5·18) 당시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고, 궐기대회 사회를 보는 등 시민들을 위해 함께 뛰었던 김태종 씨(국문·76)의 말이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궐기대회를 진행하며 시민들과 하나 되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그는 5·18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다.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하며

1980년 5월 21일, 그는 전남도청으로 향하던 중 노동청 부근에서 계엄군이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발포하는 것을 목격했다. 전남대학교 부근과 광주역 앞에서의 발포도 있었지만, 당일 전남도청에서의 대대적인 집단 발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발포 이후 사람들은 생존 투쟁의 입장에서 무기를 무장했다”며 “나와 같은 소위 운동권 학생들도 그 전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고 말했다. 이후 군인들이 퇴거한 뒤 광주를 봉쇄하며 도청 앞 광장으로 시민들이 몰렸다. 실종된 친지나 가족을 확인하러 온 사람도 있었고, 상황이 궁금해 모인 사람들도 있었다.

22일에는 협상보고대회가 개최된 후 한 수습 위원이 “시민들이 총을 들었다는 것은 반란군”이라며 “빨리 총기를 반납하고 치안 질서를 군인과 경찰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의 말에 야유와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광주 시민들을 보며 김 씨는 윤상원 선배 등 동료들과 함께 녹두서점으로 모였다.

“결국 단순히 하나의 돌발적인 사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 일은 보상받고 끝날 일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결정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

녹두서점에 모인 모든 이들이 이러한 의견으로 일치했다. 그들은 이를 계기로 5·18을 민주화 투쟁으로 바꿀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인류 발전에 어떤 기여 할 건가”

23일 오후 3시부터 총 5차례의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불안감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광주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분수대로 몰려들었다. 격식을 갖춰 대회를 진행하며 시민대표, 노동자 대표 등 각계각층 대표의 성명서 발표도 이뤄졌다. 그는 5차례의 궐기대회 사회를 맡아 진행하며 광주 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한 시민은 이 사태의 모든 원흉은 전두환이라며 전두환 화형식을 제안했다. 어떤 나이든 아주머니는 4·19의 기억을 떠올리며 학생들이 앞장서서 홍보와 질서 유지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사회를 보는 나에게 많은 광주 시민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었다”고 말했다.

이후 1년 3개월의 피난 생활을 겪었다. 목포와 광주 등 전국 각지를 쫓아다니며 방 하나 얻어 사는 불안한 삶이었지만 늦게 잡혔기에 당시에 잡힌 사람들보다 나았다. 그는 “27일 잡혀간 사람들은 엄청난 취조와 고문을 당했고 현장에서 돌아가신 선배를 떠올리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살아남은 자들이 항상 중요한 것 같다고 느낀다.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죽음이 우리의 역사와 인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는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몫이다.”

예술,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는 역할

“학생 운동이라고 하면 쉽게 데모를 생각할 것이다. 효과적이긴 하지만 지속성이 없고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예술 활동을 통해 사람들의 정서와 감수성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 활동을 통한 민주화운동이다.”

대학 입학 당시 1976년 그는 우리 대학 연극반에 들어갔다. 이후 1980년 1월 연극반, 탈춤반 출신 동료들과 함께 극단 ‘광대’를 창립했다.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불리지만 그는 이러한 문화 활동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980년 3월 15일 극단은 당시 무진관으로 불리던 YMCA 1층 체육관에서 창립 공연을 열었다. ‘돼지풀이’라는 작품으로, 돼지고기 파동을 다룬 농촌극이다. 단원들이 직접 농촌 현장에 가 실태를 파악하고 공동으로 극본을 쓴 최초의 마당극 형태다. 그들은 항상 예술이 현실의 모순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4개의 극을 더 올렸고 시민궐기대회와 여러 홍보활동에도 함께 했다.

5·18 30주년을 맞아 2010년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 ‘화려한 휴가’를 만들었다. 국립극장과 일본에 초청받아 도쿄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5·18이 너무나 끔찍하고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밝은 면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어 “상당히 보람 있었고 앞으로도 문화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와 공동체에 관한 관심 갖길”

“인생이라는 건 어떤 매듭 마디가 있으면 기억이 난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20대를 많이 기억한다. 특히 20대의 5·18 열흘의 기억은 거의 시간대별로 남아있다. 그만큼 나에게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5·18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역사적 책무를 다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닌 망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전남대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더 발굴되어야 함을 짚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 모인 사람들이 일일이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모인 한 사람마다 당시 옆에 있었던 이들을 묻고,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을 반복한다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진압 때 희생된 전남대인들, 또 이후 5·18 진상규명 투쟁을 위해 노력한 전남대 출신들의 이야기들이 좀 더 풍부하게 조사되고 연구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5·18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음을 설명했다. 김 씨는 “지금은 5·18을 정치적으로 민주화 운동이라 말하지만, 당시에는 신군부로부터 광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며 “후배들이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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