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물 작성 및 배포…‘대학의 소리’ 제작
투사회보 만들어 시민들에게 행동강령 전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내용 찾아 알리는 작업 하고파”

 

<전대신문>이 전남대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1980년 광주5월민중항쟁 당시 전남대학생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과 설립 34주년을 맞이한 ‘한국현대사회연구소(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이끈 고(故)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구술 채록된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

“전국 어느 대학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항쟁이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주도에 의해 시작됐다. 우연히 공교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60~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왔던 중심 세력 중 하나가 전남대 학생들이라는 것을 재학생이나 선후배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전남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전통이 되고 역량이 축적되어 광주5월민중항쟁(5·18)의 동력이 됐다.”

5·18 당시 유인물을 작성하고, 투사회보팀으로 선전 활동에 주력했던 전용호 씨(경제·78)의 말이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광주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그는 5·18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농성하며 보낸 나날들

1980년 4월, 총학생회(총학)가 소위 말하는 민주총학으로 건설되며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정부가 학생 활동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던 시기였다. 총학생회 내 비밀 기획실에서 일하던 선배가 그에게 유인물을 만들 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총학은 선언문 등의 유인물만 만들어 공식기구에서 다룰 수 없는 성격의 유인물이 제작할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대학의 소리’다. 총학이 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면, 대학의 소리는 조금 더 강도 높은 주제인 노동과 농민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단체가 만든 유인물은 시민들 대상으로 3회 배포됐다.

그는 4~5월의 대부분 농성하며 시간을 보냈다. 약 200명의 학우들과 중앙도서관(現 도서관 별관)에서 지내며 단식 농성에 참여했다. 5월 8일부터 16일까지는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열려 전남도청에서 가두시위와 횃불시위를 했다.

투사회보팀 일원으로

전 씨는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다.

“18일을 기점으로 3일간 시위에 참여했지만, 단순히 계속 시위만 참여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학우들과 의견을 모았다. 시위는 시내 중심부에서 일어나기에 이러한 소식을 모를 수 있는 외곽 주민들을 위해 유인물을 만들었다.”

유인물은 5월 17일 자정 계엄령이 확대되었다는 사실과 계엄령의 의미가 무엇인지 담았다. 전 씨는 작성한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등사 작업과 인쇄를 진행했다. 그는 “대략 500장을 인쇄하여 조를 나눠 집마다 뿌렸다”며 “뿌린 뒤 학동에서 다시 만나 밤에는 작업을, 낮에는 배포를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21일 오전, 전 씨는 녹두서점으로 향했다. 당시 선배였던 윤상원 씨는 녹두서점에 도착한 그에게 “들불야학이 투사회보 제작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들불야학에 소속되어있던 전 씨는 이후 구성된 투사회보팀에 참여했다. 투사회보팀은 물자조달조, 문안작성조, 필경등사조, 배포조 총 4조로 이뤄졌다. 당시 광주는 봉쇄돼 신문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고, 뉴스에는 오로지 군인들의 모습만 비칠 뿐 광주 시민들이 총에 맞거나 구타당하는 장면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에 들불야학은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행동 강령이나 소식 등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투사회보팀을 관리하고 홍보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전남대 스쿨버스를 빌려 타 외곽을 돌며 시민들에게 선전 활동을 진행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전 씨는 23일부터 진행된 시민궐기대회 홍보를 담당했다.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하며, 차에 마이크를 설치해 궐기대회를 홍보했다. 이외에도 ‘헌혈 모금’ ‘캠페인’ ‘송백회와 대자보 작성’ 등의 일을 했다. 궐기대회가 마무리될 무렵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궐기대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들린 이야기였다.

궐기대회가 끝난 후 YWCA 건물에서 유인물을 제작하던 전 씨는 도청으로 계엄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후 도청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되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그는 결국 도청으로 향했고 골목마다 퍼진 계엄군을 마주했다. 전 씨는 “계엄군이 거리에 퍼져 녹두서점에 갇혀있었다”며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총소리가 시작됐고 라디오에서는 폭도들이 공격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계엄군을 목격한 그는 녹두서점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광주고등학교 앞에 있는 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전 씨는 “가던 길 중 무언가 시커만 공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며 “알고 보니 철모를 쓴 계엄군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서울로 피신했지만, 수배령이 내려졌다. 당시 교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을 자수시키거나 자신이 사표을 내라는 협박을 받았다. 전 씨는 집으로 돌아왔고, 어머니의 손에 끌려 조사를 받게됐다,

문학도의 길

“회사에 취직해 평범한 생활을 할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민주화 운동가로서 저항하는 삶을 살려고 했다. 기독청년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등에서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끝까지 민주화를 향한 의지와 함께 살아가려 했던 전 씨. 1986년 투병 생활을 거친 후부터는 삶이 바뀌었다. 출판사 편집장을 역임한 그는 1987년부터 출판사 생활을 이어갔다. 90년도부터는 글을 쓰기 위해 소설 공부를 시작했다. 광주매일신문사 신인 소설가로 등단한 때는 1998년이었다. 전 씨는 “초·중고등학교 때 문학도의 바람이 있었다”며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며 문학도의 길을 떠난 것이지 국문학과 같은 학과를 진학했다면 삶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문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 2010년부터 5·18과 관련한 글도 쓴다. 2019년에는 황석영 작가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함께 집필했다. 5·18기념재단이나 기록관과 함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전 씨는 “앞으로 10년 동안 저술작업을 이어갈 것 같다”며 “5·18에 관한 출판과 작업과 역사 속으로 사라질만한 중요한 내용을 찾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한 시대의 역사적 역할을 맡았던 대학이다”며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학업에도 열중해 미래 세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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