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서점 운영하며 학생운동 지원
"김대중한테 받았지?" 잔인한 고문으로 만들어낸 신군부 시나리오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을 한 것을 제외하고, 한 번도 어떤 단체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다. 5·18기념재단 이사장들 전부 다 관련자이긴 하나, 무슨 역할을 했나. 그런데 항쟁 지도부에서 정식으로 일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해본 사람이 없다. 정동년이나 나 같은 사람도 한 일이 무엇이 있나. 막상 일이 터졌을 때 그 자리를 채워준 사람들은 구둣방 시다(일하는 사람의 옆에서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같은 사람들이었다. 상무대 영창에서 구둣방 보조 노릇을 하던 14살 아이를 만났다. 맞아서 멍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데도 영창에 들어와서 겁을 내는 게 아니고, 얼마나 광주 사람들이 지금 용감한지를 우리에게 자랑했다. 참 기특했다. 이런 사람들이 움직여서 광주의 열흘을 버텨준 것이다. 이게 그렇게 부끄럽고도 자랑스럽다.”

녹두서점을 운영하며 학생운동의 기반을 다졌던 김상윤 씨(국문·68)는 5·18민중항쟁(5·18) 직전 예비검속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그는 현재 윤상원기념사업회의 고문을 맡고 있다.

녹두서점과 총학
1970년대 후반, 어용 교수 문제와 병역집체훈련 등으로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던 시기였다. 정보과에서 알 수 없는 활동 인자들이 많아져야 학생운동이 제대로 이뤄진다고 생각했던 그는 의식화를 위한 비밀 학습조를 만들었다. 당시 지도교수가 상담 지도관실에서 학생들을 계속 감시했고, 매일 상부에 보고가 올라갔다. 학내에서 조금만 분위기가 이상해도 해당 학생들을 잡아가버렸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5~6명이 한 조를 이루어 비밀스럽게 공부했다. 6개월 정도 공부를 하고 나면, 그 사람들이 퍼져서 또 5~6명의 비밀 학습조를 만드는 방식으로 수를 늘렸다. 그러나 그는 정보과에 담당 부서가 있을 정도로 계속 감시받는 처지였기에, 같이 활동하면 다른 사람들도 위험해질 것 같다고 판단했다. 비밀학습조 초창기 멤버인 윤상원에게 그 일을 전적으로 맡기고, 그는 녹두서점을 지어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녹두서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에게 고등학교 후배이자 당시 철학과 3학년이었던 한상석이 찾아왔다.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학자추)를 만들고 이를 통해 총학생회(총학)를 탄생시키려는 계획이니, 자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120만원을 모아 전달했고, 한상석은 학생회가 정식으로 출범된 후 학생과에서 경비를 지원받아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는 “학자추 공청회에서 학생회 출범을 이야기하다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박관현이다”고 말했다.

체포의 전조
“누군가 셔터를 막 두들겼다. 후배인 줄 알고 셔터 문을 열었더니, 누군가 권총을 목에다 탁 들이대며 ‘김상윤이지?’하고 물었다. 저쪽에서 서광주 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들은 앞에 대놓은 군용 지프차에 나를 태우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그렇게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그는 이화여대에서 회장단들이 다 잡혀갔다며 확인해달라는 양강섭 총학 총무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노금노 총무, 이병철과 함께 녹두서점에 모여 이리저리 전화를 해봤지만,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병철의 권유로 가톨릭노동청년회에 전화해 계엄령이 확대됐고 전화가 도청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재차 온 양강섭의 전화를 받아 피하라고 언질한 뒤, 자신도 피신해야겠다고 생각해 금고에서 돈을 꺼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 여자가 화순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이놈들이 미리 와서 잠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셔터문을 내리니까 어떤 여자보고 전화하도록 시켜서 안에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조작된 53만원
“정동년이나 나는 5월 18일이 되기도 전에 잡혀온 사람들이라, 5·18이 터지는 걸 하나도 못 봤다. 그런데 정동년은 사형 선고를 받아, 나도 당연히 사형을 받을 걸로 생각했다. 조사한 사람도, 밖에서도, 아내와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한 달 동안 고문해, 정동년을 수괴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자수 마감 날인 6월 30일, 양강섭이 자수해 들어왔다. 그는 “양강섭이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조사받고 소변을 봐야 하는데 설 수가 없었다”며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던 양강섭은 선거 자금을 김상윤 선배에게 받았다고 털어놨다”고 말했다. 그 당시 신군부는 5·18을 북한의 사주로 볼 것인지, 김대중의 사주로 볼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학생 운동 관계로 처음 한 달을, 나중에는 사상 관계로 한 달을 조사받았다.

조사관은 한 방에 학생들을 둘러앉혀 벽을 보며 조사받게 하고, 그를 한가운데 앉혀 조사했다. 그는 “발바닥을 몽둥이로 계속 맞았는데 그 자리에서 악을 쓰거나 살려달라고 할 수 없었다”며 “참느라고 이를 으드득으드득 갈았던 모양인지, 그걸 등 뒤에서 듣던 조선대 학생이 정신이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그의 입에 수건이 물려졌다. 이를 가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조사관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를 고문했다.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들을 스스로 지어내 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얻어터지는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는 이것을 폭로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확실하게 알리바이를 댈 수 있는 날짜에 모의를 했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80년 당시 박관현의 총학 선거 자금으로 교수 2명과 윤상원, 자신의 사비를 보태 전달했던 53만원은, 김대중에게 받은 광주사태의 자금으로 조작됐다. 그는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저들이 원하는 형태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불가항력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용서가 안되는 부끄러움이 있다.”

교도소에서 깨달은 '무지'
형이 확정되고, 그는 광주교도소에서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홍성교도소로 보내졌다. 아내가 그를 보러 7시간을 와야 할 정도였다. 그곳에 혼자 있으며 맨 처음 생각한 것은, 있는 대로 세상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는 “책 몇 줄 읽어서 혁명가인 척했지만, 실상은 달랐다”며 “농민들이나 노동자가 아닌,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년 7개월만에 석방된 후, 의료기기 회사에 주저 없이 취업했다. 이후 2년 정도 근무를 하다가, 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회사의 이름은 ‘하심’으로, 관념의 세계에서 내려와 있는 대로 세상을 배우고자 지은 이름이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했는데, 결국 군부가 원하는 대로 다 만들어줬다. 이래놓고 무슨 리더라고 말하나. 이제 그러한 책임이 있는 자리는 일체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는 교도소에서 자신이 앞장서서 리더 역할을 맡을 사람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5·18기념재단 이사장 권유를 거절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그는 “광주의 5·18은 차별에 저항한 것이다”며 “이는 평등이나 정의와 같은 말이다”고 말했다. “전남대 민주길이 정의, 인권, 평화의 가치를 모아 만들어진 길인 만큼, 학생들이 이러한 정신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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