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그서 나서 여그서 살고 있어. 결혼을 한 동네에서 했지. 그래가꼬 여그서 계속 사는 거요. 오는 사람들은 다 그래, 마을 좋다고. 근디 우리는 몰라. 다른 사람들이나 그러제.”

곡성 가정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양영숙 씨(70)는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70년을 지내오며 익숙해진 마을 모습이 좋은지 모르겠다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이다.

가정마을은 2002년부터 ‘가정농촌체험휴양마을’로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양 씨는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했다. 그는 마을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가서 음식을 팔았다.

“2002년부터 관광열차가 곡성역까지 왔어. 그러면 인자 우리가 나가갖고 준비해서 거그서 비빔밥이랑 부침개 해갖고 장사를 했어. 그러믄 여행 온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서 묵어가고 인제 그런 식으로 했지.”

체험 마을을 운영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젊었을 때라 거뜬하게 해냈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제. 지금은 전부 연세 들어갖고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우리도 어려워. 내 밑으로 사람이 들어와서 살아야 좀 일이 편한디. 없어, 젊은 사람이.”

마을은 여전히 여러 체험을 진행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일할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양 씨는 “요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로 젊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양 씨는 가정마을의 부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시방 명칭만 부녀장이라고 그러고 있제”라면서도 “누가 할 사람이 없응께. 인자 위원장님하고 둘이서 책임지고 있어”라고 말했다. 말 속에서는 마을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옛날에는 벼농사 짓고, 보리 같은 거 심어 먹고 그랬는데, 지금 와서는 개발이 돼서 다 기계로 혀. 지금은 감나무 같은 과일 심어갖고 허고 있지. 요시는 우리 먹을라고 조금씩 고추나 참깨 심고 그래. 사고팔고 이런 건 안 혀.”

최근에는 과일을 수확하고 콩이나 팥을 재배한다. 가족, 이웃들과 나눠먹을 만큼의 작물만 심고 기른다.

가정마을을 떠날 때가 되자, 그는 “친구들 델꼬 많이들 놀러오고 그려”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의 미소에 절로 마음이 넉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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