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 “의사자지정·특례입학 주장한 적 없어”
시민 200여명 현장 단식 동참 “힘이 되고 싶다”

답답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네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진실규명을 위한 수사·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다.

여야가 지난달 19일 특별법 재합의안을 내놓았지만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거부했다. 유가족들의 주장은 쏙 빼놓은 ‘여야’만의 합의안이었기 때문이다. ‘유민아빠’ 김영오 씨는 지난달 20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고자 청와대로 향했지만 청와대는 “대통령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답변만을 내놓았다.

이처럼 특별법과 관련해 안팎으로 답답한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광화문광장(광화문) ‘세월호 단식농성장(단식농성장)’에서 만큼은 달랐다. <전대신문>이 단식농성장을 찾았던 지난달 21일 많은 비가 내렸다. 하지만 영화인, 종교인,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고, 자원봉사자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천만인 서명 운동(서명 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목청껏 소리 지르고 있었다.

유가족과 함께하는 ‘국민단식’
특별법 제정 피켓을 들고 있던 한 시민은 “한 아이의 부모이기 때문에 왔다”고 했고, 주은선 씨(38)는 “유가족에게 수사·기소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 때문에 나왔다”고 말했다. 김준태 씨(47) 역시 무능한 정부의 대응을 보고서 단식을 마음먹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수사·기소권이 배제된 여야 재합의안에 분노했고, 유가족들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광화문을 찾았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국민단식’을 등록한 사람만 2만 명을 넘어섰고, 만화·시민단체·영화·종교 등 200여명의 사람들이 단식농성장 현장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김영오 씨가 있는 ‘가족단식장’도 보였다. ‘인터뷰를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문구가 걸려있는 천막에는 가림막이 내려와 있었다. 청와대에 다녀온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김 씨를 볼 수는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단식농성장을 찾아왔다.

지난달 6일 진도에서 출발해 21일 광화문까지, ‘세월호 도보순례’를 마친 청년 NGO 단체 김희범 대표(27)와 안산 시민 등은 가족단식장 앞에 서서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건넸다. 한 아이는 ‘아저씨 부탁인데 단식을 멈춰주세요’라는 글귀가 써진 스케치북을 김영오 씨에게 전달했고, 일본에서 온 동경국제대학교 학생들은 1,000마리의 종이학을 선물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국민여러분들의 힘을 믿겠다”며 “마지막 최후 1명을 찾을 때 까지 꼭 특별법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가족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진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오후 5시가 되자 언론사의 수많은 기자들로 광화문은 붐볐다. 김영오 씨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종교계 대표들이 김 씨를 찾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조차 고돼 보였다. 그는 그저 묵묵히 눈을 감은 채 번쩍이는 카메라의 플래시만을 받아내고 있었다. 단식 39일 째였다.

장송회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응용화학공학·99)은 “유민아빠가 어제 무리했는지 계속 누워있는 상태다”며 “청와대를 가려고 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여기서 계속 싸우겠다는 입장이다”고 말했다.

오후 7시. 단식농성장의 하늘이 어두워지자 하나둘 촛불이 켜졌다. 많은 비가 내렸지만 자리를 뜨지 않은 시민들은 촛불집회를 함께했다. 단식농성장의 한 천막에 자리한 10여명의 유가족들도 단식농성에 동참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의 목에는 희생자들의 학생증이 걸려있기도 했다.

故 한정무 학생(단원고 2학년)의 아빠 한상철 씨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먼저 전했다. 한 씨는 “4∼5월에는 국회의원, 청와대의 모든 이들이 책임자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다”며 “앞으로는 의사자지정·특례입학과 같이 특별법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홍보 하겠다”고 말했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단식농성장은 붐볐다. 한쪽에서는 서명운동이 계속됐고, 30여명의 사람들은 늦은 시간 까지 노란리본을 메고 자리를 지켰다. 자정이 넘어서야 하나 둘 텐트가 쳐졌고 천막의 가림막이 내려왔다. 여전히 자동차 소음으로 시끄러운 새벽, 사람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수사·기소권 포함된 특별법 제정하라”
다음날 오전 7시 단식농성장은 어수선했다. 단식 40일 째로 접어든 김영오 씨가 건강악화로 병원에 후송됐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김태연 씨(53)는 “김 씨의 상태가 위급해 병원으로 후송됐다”며 “주치의가 계속 병원 행을 권했지만 링거도 맞지않을 것이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사람이 쓰러지는 데도 대책이 없는 정치권과 정부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오민애 씨(50)는 “아버지들이 자식이 죽은 이유도 알지 못한다”며 “젊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해야한다. 아픈 상처는 도려내야한다.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다”고 전했다.

햇살이 쏟아지는 오전 10시가 되자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종이를 부친 사람들이 단식농성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는 “병원에 가서도 단식을 하겠다”는 김영오 씨의 기사가 올라왔다. ‘항상 기억 하겠습니다'라고 적힌 노란색 리본이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전대신문>이 세월호 참사 특집기사를 한 학기 동안 연재합니다. 다음호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각종 유언비어의 진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기고(만화, 시 등 문예작품 포함)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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