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신채영(미술·08)
삽화=신채영(미술·08)

전근대적 인치(人治)의 패러다임이 권력에 대한 공포를 통해 작동했다면 근대적인 법치(法治) 패러다임은 법에 대한 존중(Achtung)을 통해 작동한다. 근대 법치주의의 이념은 시민들이 그들 스스로를 법의 저자이자 수신자로 인식하면서 서구 근대적 정치 공동체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법의 저자와 수신자의 동일성이 전제될 때, 준법은 소극적인 의무가 아니라 적극적인 권리가 된다. 법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법적 인격체로 행할 것을 명하는 자기 명령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 명령은 각인의 자유가 모든 사람의 자유와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최소 조건들의 체계로서 법적 공동체를 구축함과 동시에 타율적으로 부과되는 어떠한 명령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율적 인격들의 의지를 표방한다. 이런 점에서 법치 공동체는 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부과되는 모든 종류의 감시를 원천적으로 배제한다.

기술문명의 산물로서 감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서 일부의 논자들은 감시체제의 확대를 정보화된 현대사회의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비대해진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행정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서, 사회적 공공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범죄를 예방하고 시민들의 준법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감시체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달이 쏟아놓은 다양한 매체들로 인해 구성원들의 관계형성 및 소통방식이 다변화되고, 익명적인 대상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사회적 관계 형성을 위해 정보를 요구하고 축적하는 것은 정보화된 현대사회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일 수 있다. 또한 행정 당국 및 국가 권력에 의한 개인 정보의 축적과 관리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문제는 국가와 행정 권력에 의한 감시 시스템의 정당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정보의 수집과 축적은 본질적으로 행정 권력의 강화 및 확대와 맞물려 있다. 감시과정이 가속화되면서 나타나는 행정력의 확대는 권력의 불균형 현상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특정집단이나 계급에 의한 타집단과 계급에 대한 지배를 여러 가지 수준으로 강화할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을 행정 권력에 의한 관리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점이다. 감시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시민들은 자치가 아니라 통치에, 자유가 아니라 강제에 길들여지게 된다.

전자주민 카드, 인터넷 실명제,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사찰, CCTV를 달고 달리는 시내버스뿐만 아니라, 파파라치나 쓰파라치와 같은 온갖 종류의 상업적 감시꾼들에 이르기까지 감시기제들이 진화해 가는 현상을 보면, 대한민국을 감시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과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감시의 천국에선 법에 대한 자발적 존중과 법적 인격체로서의 자기 존중에 근거한 준법 보다는 오히려 법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사회에서 시민들은 그들 스스로를 법적 명령의 저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법적 명령의 일방적인 수신자로 인식한다. 감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없는 사회가 질서와 체계를 가질 수는 있으나 자율과 소통을 가질 수 없는 이유다.

법치가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감시란 정치 및 행정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을 견제하기 위한 시민들의 감시, 즉 아래로부터의 감시일 뿐이다. 사회적 연대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국가 권력을 감시하는 것, 감시를 부추기는 행정 권력을 감시하는 것, 우리는 이를 발전적이고 건강한 감시라고 부를 수 있다.

사회계약론자 홉스(T. Hobbes)가 쓴 『리바이어던』의 표지에는 창과 사교장을 들고 왕관을 쓴 절대군주가 정중앙에 버티고 있다. 신민들의 머리와 눈으로 가득 찬 이 리바이어던의 몸체를 들여다보면 권력의 보호가 주는 안도감보다는 아찔한 공포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절대적 권력에 자유와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안전한 자기보존을 약속받았던 홉스의 이기적인 나라에서 조차도 통치 권력은 신민의 자유와 권리를 대리할 뿐이라는 인식을 놓치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감시 기제들을 통해 시민들의 자율을 타율로 변질시키는 나라,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 이쪽, 저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국가 권력에 의한 시민들의 감시를 일상화하고 있는 나라, 행정당국이 금전적인 포상을 미끼로 시민들 상호간의 감시를 권장하는 나라, 21세기 한국 사회를 그림으로 그려 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긴 하지만 결코 그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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