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전남도청

1980년 5월, 광주는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투사들의 숨결로 가득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흔적들은 아직 광주에 남아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전대신문>은 5·18 민주화운동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 우리 대학 정문, 전일빌딩, 옛 전남도청(5·18 민주광장)을 다녀왔다.

# 5·18 민주화운동의 시작점, 우리 대학 정문

▲ 우리 대학 정문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와‘대학 휴교령’이 발표되고 1980년 5월 18일 오전 우리 대학 정문 앞 공수부대가 배치됐다. 비상 계엄령 전국확대, 강제 휴교 조치가 발표되자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우리 대학 정문으로 모여들었고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공수부대는 진압봉을 앞세워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이면서 소식을 들은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향했다. 이는 1980년 민주화의 물결을 이끈 5·18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1980년 5월, 우리 대학 정문을 시작으로 광주 민중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국가 폭력에 맞서 싸웠다. 현재 우리 대학 정문의 모습은 80년 당시에 비해 상당 부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흔적은 아직 정문에 남아있다.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1980년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를 기리는 ‘혁명 정신 계승비’를 세우고 앞길에 관현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우리 대학 정문은 ‘5·18 민중항쟁 사적지 1호’로 지정됐다.

# 헬기 사격의 흔적이 남은 전일빌딩

▲ 전일빌딩에 남은 헬기 사격 흔적

1980년 5월의 현장을 온전히 목격하고 온몸으로 기억하는 곳이 있다. 바로 금남로 1가 1번지에 위치한 전일빌딩이다. 80년 5월 당시, 전일빌딩 앞쪽 금남로에서는 광주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붓던 계엄군에 맞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에 쫓긴 시민들은 바로 앞에 있었던 전일빌딩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전일빌딩을 중심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7년 빌딩 내외부에서 245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되면서 전일빌딩은 신군부의 사전 계획에 따라 전개된 헬기 사격의 명백한증거가 됐다.

이후 전일빌딩은 헬기 사격의 흔적과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난 11일 ‘전일빌딩 245’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광주시민에게 돌아왔다. ‘전일빌딩 245’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으로 전일빙딩 외벽과 10층 내부에 남겨진 총탄 흔적 245개를 의미한다. 지하 1층·지상 10층 규모인 ‘전일빌딩 245’는 ▲시민 프라자(지하 1~4층) ▲광주 컨텐츠 허브(5~7층) ▲휴게공간(옥상정원,굴뚝정원·8층, 옥상) ▲5·18 메모리 홀(9~10층)로 변신해 광주시민을 기다리고 있다.

# 5·18 최후 항쟁지 옛 전남도청 (5·18민주광장)

▲ 5·18 광장에 자리한 전두환 치욕 동상

옛 전남도청과 5·18 민주광장은 시민군의 본부로 80년 5월, 열흘간의 집결지로, 최후 항쟁지로 마지막까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선혈로 가득 찼던 곳이다.

당시 전남대 학생들이 모여 폭력 진압을 알린 것을 시작으로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됐다.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이 시작되던 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을 벌였고 다수의 시민군이 희생됐다.

옛 전남도청과 광장은 당시 교전의 흔적과 5·18민주화운동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적지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국립 아시아 문화 전당이 건립되면서 원형의 모습을 잃고 상당 부분이 훼손돼 현재 광주시가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현재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는 5·18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또한 당시 5·18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주도했던 전두환의 고(故) 조비오 신부 사자 명예훼손 재판과 관련해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는 전두환 치욕 동상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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