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장유진 기자
삽화= 장유진 기자

도서관에 가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의 책들을 검색하고 찾아보자. 검색창에 적힌 분류기호를 따라 이 코너에서 저 코너로 동분서주해야 할 것이다. 책 제목을 보면 랑시에르가 다루는 대상은 역사학, 교육학, 문학, 정치학, 미학, 영화학에 속하는 것 같다. 책날개를 펼치면 그는 철학자로 소개된다. 대학은 분과 학문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각 학문에는 나름의 방법과 대상이 있다. 철학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물론 철학자가 소설이나 시를 읽고,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럴 듯하게 몇몇 개념을 버무려 책을 낼 수는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의 책은 그런 류의 에세이도 아니다. 그와 그의 책은 어디에 속할까? 이런 혼란은 랑시에르의 철학관에서 연유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무엇‘에 대한’ 담론이 아니라 무엇 ‘사이의’ 담론, 영역 및 학문 간의 나눔을 문제 삼는 담론이다. 그는 위에 열거한 분과학문에 대한 각론을 쓴 것이 아니라 학문 간의 장벽을 없애려고 노력한 것이다. 영역을 재단하는 방식이 제도화되어 있을 지라도 사유의 대상은 모두에게 속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랑시에르가 그의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와 단절했던 그 시점에서. 랑시에르는 1960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서 청년 맑스에 대한 논문을 썼고, 1965년에는 알튀세르가 주관한 『자본』 읽기 세미나에 참석했다. 알튀세르는 청년 맑스와 장년 맑스를 나누고,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구분했으며, 이론적 실천 또는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같은 개념을 주장했다. 하지만 68운동을 겪고, 이후 알튀세리앙들의 행태를 보며 랑시에르는 의심했다. 알튀세르의 철학이 전제하는 다음과 같은 관념이 문제였다. 피지배자는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배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배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이 고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식인이 그들에게 결핍된 인식을 쥐어주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노동자 운동이 태동하던 1830-40년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문서고에서 기대했던 것은 맑스의 사상 이전에 구축된 노동자 고유의 문화, 존재방식, 계급의식이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도 읽고 생각하며 ‘밤’을 만들려고 했다. 이튿날의 노동을 위한 휴식과 재생산의 시간인 밤을 시인이나 사상가에게만 허락되었던 방식으로 쓰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노동자 말투가 아니라 ‘공통의 언어’로, 다른 사람들처럼 쓰려했다.

예컨대 소목장이였던 가브리엘 고니는 자신의 노동일을 꼼꼼히 묘사하며 어떻게 자신의 시간을 도둑맞고 있는지 풀어냈다. 그리고 최소 생활비를 계산하면서 부를 늘리는 경제학이 아니라 자유를 늘리는 경제학을 구상했다. 또한 문인의 문체로 시를 쓰기도 했다. 요컨대 노동자들이 구했던 것은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것, 시간을 다르게 써보고 싶다는 것, 자기도 말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유지된 사회 질서의 조직 원리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국가/정체』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성향에 따라 한 가지 일을 적기(適期)에 하는 것이 올바른 나라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일은 사람의 한가한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 고로 장인은 다른 일에 기웃거릴 시간이 없으며, 자신의 일터를 비워서도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영혼의 삼분할에 관한 우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신은 통치자의 혼에는 황금을, 수호자에게는 은을, 농부나 장인에게는 쇠와 청동을 섞었다는 것이다. 이 위계 속에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다. 하지만 19세기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단절하고 그들의 하층 문화라고 여겨진 것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묻는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생각하고 통치하는 사람이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노동만 해야 하는 일꾼인가? 물론 지배자들은 이렇게 응수할 것이다. “네 분수를 알라.” 하지만 마루판을 까는 품팔이 노동을 하던 노동자는 일손을 놓고 창밖으로 보이는 그림 같은 정원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이것이 칸트가 말하던 ‘무관심한’ 취미 판단에 해당하는 것이며, 노동자 해방은 무엇보다 ‘감성적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은 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소리는 즐거움과 고통의 징표로서 다른 동물에게도 있지만, 말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라서 정의와 부정의를 명시하기 위한 것이며, 인간만이 선과 악과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공통된 감각을 갖고서 가족과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나 어린 아이는 온전한 정치적 동물로 셈해지지 않았고, 노예는 주인의 말은 알아듣지만 말을 갖고 있지 않다고 간주됐다. 정치는 어떤 것은 말이고 어떤 것은 외침인지 누가 말을 갖는지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된다. 19세기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은 단지 나를 인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다. 방언을 쓴다면 서로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 그것은 공통의 것, 정치의 대상을 삭제하게 된다. 그럴 경우 두 가지 선택지만 남는다. 낯선 타자와 그의 알 수 없는 말 앞에서 끝까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거나 상대를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반면 공통의 언어를 쓴다는 것은 공통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나아가 지적 능력의 평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권력의 형성, 분배, 행사라는 근대적 관념이 아니라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 자리와 정체성,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나누는 활동과 관련 있다. 랑시에르는 이를 ‘감각적인 것의 나눔’으로 개념화한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란 공통의 세계인 감각적 공간을 재단하는 방식, 그 공간에서 공통의 대상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하는 방식, 그 공통의 대상을 지칭하고 그에 대해 논변하는 주체들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는 방식을 가리킨다. 랑시에르는 개념을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하곤 한다.

그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이란 공통의 감각 세계(플라톤이 예지계에 맞세웠던 감성계에서 차용한 것), 이 감각세계에서 주어지는 감각적 소여들(감각 대상들과 주체들 또는 보이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지각하고, 명명하고, 사유하는 감각 형식들(칸트의 선험적 감성 형식을 참조한 것)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치안과 정치, 이렇게 두 방식으로 나뉜다. 치안이란 경찰이나 국가의 억압 장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나 보충을 알지 못하는 포화 상태의 원리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회는 각자 정해진 자리에서 제 기능을 수행하는 집단들로 이루어진 전체여야 한다. 이 사회에서는 누가 말하는 존재인가를 둘러싼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본 것에 대한 의미 사이에 ‘감각적 명증성’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랑시에르는 그것을 합의(consensus)라고 부른다)에 바탕을 둔다.

감각 대상과 그에 대한 의미는 이미 정해져 있거나 혹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 감각 대상에서 달리 볼 것이 없으니 달리 말할 것도 없고 달리 할 것도 없으며 다른 셈법은 불가능하다는 것. 예컨대 도로는 차 다니는 길이지 시위 공간이 아니고, 노동자는 기업과 계약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을 해서는 안 되며, 임금이란 사주와 노동자 개인의 계약이지 단체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등등.

반면 정치란 결핍이나 보충(‘하나-더’)을 도입함으로써 이 포화 상태의 질서를 뒤흔드는 주체의 활동이다. 랑시에르가 문서고에서 밝혀냈듯이 노동자의 해방은 자기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살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고통 받는 동물이 아니라 공통 세계에 참여하면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없는 시간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이처럼 정치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옮기는 것,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 아닌 몫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통의 세계를 재편성하고, 보이지 않던 혹은 보여서는 안 되는 공통의 대상을 보이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공통의 대상을 가리키며 논변하는 주체들의 말을 듣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정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감성적/미학적인 것이라는 것이 랑시에르의 생각이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