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사고 당일인 4월 16일 배를 빠져나오지 못한 304명의 승객과 승무원 중 구조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아직도 스무 명 이상이 실종 상태다. 시신으로조차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0)! 이것은 구조된 사람의 수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 숫자는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저희들만 탈출한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양심 그리고 해운사와 선주의 도덕성을 가리키는 것만도 아니다. 또한 해경의 구조 능력이나 의지를 가리키는 숫자만도 아니다.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자본이 인간에 매기는 가치가,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온기가, 그 숫자에 적혀 있다. 영(0)! 없음의 표시! 그것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재를 가리키는 숫자이기도 하다.

트라우마의 글쓰기

 ▲ 삽화= 장유진 기자



 
철학자 김진석은 <한겨레신문>에 쓴 칼럼에서 “세월호 침몰과 구조 실패는 한국인의 트라우마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곧 이런 말을 덧붙였다. “희생자들의 고통에 미치지 못할 글을 쓰는 일은 괴롭다. 아무 말 없이 반성하고 애도해야 마땅하지만, 평소 글을 써오던 책임을 회피하기도 어려워, 쓴다.” 세월호에 관해서 무언가 말하고 쓰는 일은, 그가 고백했듯이, 어렵다. 뭔가를 쓰거나 말하는 순간, 하지 말아야할 짓을 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책임을 회피하기도 어려워” 말하거나 쓰게 된다. 그렇게 쓰고 나면 또 제대로 말하고 쓰지 못했다―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말해지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말해진 뒤에도 앙금으로 남는 것…. 하지만 트라우마의 가장 중요한 힘과 의의는 그런 데 있지 않다. 그가 “희생자들의 고통”이라고 부른 것—저 말할 수도 없고 (희생자가 아닌 자의 입으론) 말해서도 안 되는 어떤 것—이, 그가 감히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들에 구멍(caesura)을 내면서 출몰한다. 그리고 그런 침묵의 출몰이야말로 들리는 말들과 보이는 문장들을 지탱하고 있다. 한용운이 가르쳐주었듯이, 우리의 노래들은 떠나간, 그러나 아직 보내지 않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돎으로써만 노래일 수 있는 것이다. 부재하는 님의, 침묵(으로 있음)은 우리의 모든 언어가 그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그 주변을 맴돌게 되
는 구멍(입)인 것이다.

몸과 말 사이
앞서 인용한 김진석의 문장에서 “어려워”와 “쓴다” 사이에 찍힌 쉼표( , )에 주목해보자. 이 쉼표는 문장의 일부이다(그 문장에서, 어쩌면 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쉼표는 어떤 것도 지시하진 않는다. 기의(signifed)를 갖는 기표(signifier)도 아니고, 기호 외부의 어떤 것(referent)을 가리키는 기호(sign, 단어)도 아니다.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다. 물론 언어 바깥의 사물(thing)도 아니다. 그 쉼표는 언어화의 불가능(괴롭다, 말 없음이 마땅하다)과 실행(쓴다) 사이에 놓인 중단과 비약의 표시이다. 그것은 트라우마의 서명(signature)이며, 트라우마와 조우한 주체의 탈주체화의 흔적이다. 어떤 면에서, 조르조 아감벤의 모든 작업은 바로 저 쉼표의 자리에 놓여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유아기(infancy)’는, ‘말하는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말하는 자’와 ‘말 없는 동물’ 사이의 쉼표이다.(『유아기와 역사』*infancy는 ‘말함’을 뜻하는 fans에 부정접두어 in-이 붙은 것이다. 즉 ‘말 없는 자’, ‘말 못하는 이’란 뜻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한때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말과 몸 사이에 언제나 웅크리고 앉아있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호모 사케르’는 국가 혹은 법률체계 내부(정치적~)와 정치체의 외부(~동물) 사이에 놓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동물인 것도 아니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은 그저 살아있음(조에, zoe)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비오스, bios)이 갈리는 틈새에 놓인 존속(存續)으로서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상태이다.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은 ‘영도(zero degree)의 인간’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이런 ‘비-인간이자 비-동물’이 나타나는 곳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주목하는 것은 나치의 잔학상이 아니다(그에 관한 연구는 이미 많다). 아감벤은 거기서 주로 증언(testimony)의 문제를 다루는데, 증언이란 (그 자체로는 말이 없는) 사태와 (그 자체로는 어떤 사태도 사물도 아닌 비-존재로서의) 언어 사이에서 그 둘을 강력하게 묶는 언어이다. 그래서 증언은 ‘맹세’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이 문제는 ‘맹세의 고고학’이란 부제가 붙은 『언어의 성사』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뤄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대개 ‘증언의 불가능성’을 고통스럽게 호소하면서만 증언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자기가 겪은 일인데 왜 그렇게 증언이 어려울까? 물론 트라우마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트라우마일까?

영도(零度)의 인간
아우슈비츠에는 ‘무젤만(무슬림, 즉 이슬람교도)’이라 불리는 유태인들이 있었다. 학대와 굶주림, 질병과 절망 속에서 수감자들은 점점 말을 잃어갔고, 그와 더불어 정신의 불꽃도 꺼져갔다. 유태인들은, 가스실에서 죽든, 침상에서 죽든, 노역장이나 진흙탕에서 맞아 죽든, 그들의 생물학적 생명이 끝나기 전에, 가치와 의미를 씨줄과 날줄 삼아 직조되는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삶을 먼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간수의 채찍질과 추위를 구별하지도 못하는 ‘살아있는 시체.’ 동료 수감자들에게조차 ‘무젤만’이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려야 했던 이들. 그들은, 프리모 레비의 책 제목처럼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비통한 물음을 자아내는 상태로 떨어지고 나서야 죽을 수 있었다. 수용소에서 해방돼 이제 증언을 해야 할 생존자들은 그때 그들을 구원할 수도, 돌볼 수도 없었다. 아니, 그들이 먼저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판이었다. 그러므로 레비의 물음은 생존자들 자신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인간인가?’

무릇 (역사와 문학 모두가 참조해야할 언어적 사태로서의) 증언은, 더구나 아우슈비츠처럼 형언하기 힘든 경험에 대한 증언은 단순한 사실의 기억이나 서술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간극이 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상태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지경에서 겪었던 것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말로써 옮겨야할 때의 곤궁 말이다. 때문에 증언은 ‘주체의 탈주체화’를 ‘탈주체의 주체화’로 뒤집어 반복해야 하는 수치와 고통의 작업이 된다. 게다가 저 ‘죽음의 수용소’의 진정한 증인은 운 좋게, 강인하게 또는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아니라 죽어간 자들, 무젤만들 뿐이라고 레비는 말한다. 그래서 아우슈비츠로부터의 증언은 생존자들 안에서,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하는 무젤만(언어와 모든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자)이다. ‘나는 무젤만이었다(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있는 시체였다)’는,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고백이 증언(證言)의 심장에서 어둡게 울리고 있다. 프리모 레비는 일생을 그 울림을 견디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메시아적 역사 유물론
아감벤은 왜 이런 저주받은 존재들에 주목하는 것일까? 언어의 경계, 정치체의 한계, 인간성의 영도 등에 대해 말해서 뭘 어쩌자는 것일까? 법인지 폭력인지, 문명인지 자연인지, 생(生)인지 사(死)인지, 존재인지 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비-식별역(indiscernable)에 우리를 빠트림으로써 무엇을 공부시키려는 것일까?

민주주의와 공공영역이 파괴되고, 사람을 타인과 이어주는 말들이 돈이라는 인격 없는 기호로 대체되고, 사회가 돈, 권력, 학벌, 외모 등의 자본을 ‘가진 인간’과 ‘못 가진 비-인간’으로 양극화되고, 국경은 사라지지만 주권-권력의 장벽은 도리어 높아지고 있는 이 세기 초의 혼란(“새로운 전 지구적 질서의 유혈 낭자한 신비화”) 속에서, 아감벤은 인간과 언어 그리고 법과 정치적 삶이 탄생했던 저 모호한 지점을 탐색한다. 그가 자신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고고학(archeology)은 그런 근원(arche)에 관한 학(logy)이다. 그는 이 트라우마적 아르케들의 계보를 통해 억압된 자들의 전통,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언어가 성좌처럼 펼쳐지길, 그리하여 승리한 자들의 픽션으로서의 역사와는 다른 이야기(history)들이 입을 열기를, 우리가 그런 말이 들리는 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아감벤의 작업은, 세월호의 비극을 교통사고와 비교함으로써 그저 자연스런 ‘사고’로 만들고, 죽은 아이들과 소통하려는 유족들의 몸부림을 ‘미개한 국민성’이라 부름으로써 ‘문명 바깥의 일’로 치부해 외면하며, 이 참사의 트라우마를 자기반성과 사회변혁의 실천으로 전이하려는 모든 시도를 ‘시체장사’로 폄훼해 도리어 공격의 빌미로 삼으려는 자들에 맞서, 인간(人間)이라는 저 ‘간극(間隙)의 존재’를 지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극복자로서도 오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들조차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유물론적 역사가)뿐이다.”(벤야민, 역사철학테제 6.) 그런 역사가라면 침몰한 세월호가 가리키는 폐허의 영(0)으로부터, 우리가 목표(telos)로 삼아야할 근원의 영(0), 도래하는 공동체의 지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5월 광주가 '학살의 폐허"에서 '빛의 공동체'를 밝혀낼 수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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