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장유진 기자
지난 호에 지젝에 관한 두 번째 글을 쓸 때와 이번 호에 아감벤에 관한 글을 쓸 때, 나는 똑같은 의자에 앉아 똑같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만, 전혀 다른 ‘때’에, 전혀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 자신을 본다. 그때는 일상 속에서, 일상적 삶(ordinary life) 안에 숨은 비-일상의 작동과 탈-일상의 사태, 탈-현실의 실재(the Real) 혹은 타자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면, 지금 나는, 그리고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바로 그 ‘탈-현실의 실재’가 (자기 안과 밖에서 동시에) 요동치는 자리에 처해있을 것이다. 이런 난처(難處)한 자리에서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거기에는 일상적 질서가, 정상적 배치가, 또한 그런 배치를 가능케 하는 좌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곳’에서 사람들은 흔히 부끄러움(수치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몸을 가만히 앉혀 둘 수 없는 곳은 분노와 슬픔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이미 우리는 당도해 ‘있다.’ 어찌해야 좋을까?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대한민국
300명이 넘는 승객―대부분이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의 학생들―이 갇힌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 가라앉고, 그중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한 채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러버린 저 ‘잔인한 사월’ 내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믿던 것들―가령 국가는 국민은 보호한다, 정부는 국민의 뜻에 따를 것이며, 공무원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말을 따를 것이다, 정부는 재난상황에 대처할 것이며 성공은 못하더라도 최선은 다할 것이다 등등―도 산산이 부서져 침몰해버렸다. 선장과 승무원은 승객을 보호하지 않았고, 해운사와 선주는 배의 안전운항이나 승무원과 승객, 즉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수익과 보험금에만 정신이 팔려있었으며, 대통령과 총리의 말들은 아무런 실효도 없는 공허한 맹세와 호언에 지나지 않았고, 해경과 공직자들은 그간의 비리를 은폐하고 기록을 조작하는데 정신이 팔려 구조가 제대로 이뤄지는지는 뒷전이었다(어쩌면 구조가 이뤄져 생환한 사람들의 입에서 혹여 쏟아져 나올지 모를 분노의 언어나 진실의 고발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감시하고 비판해야할 언론, 풀리지 않는 의문들―세월호가 언제 첫 이상을 감지했는지, 왜 ‘객실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지, 왜 ‘전원구조’라는 헛소문이 공식적 통로로 유포됐는지, 왜 전 국민이 지켜보는 동안에도 가라앉는 배에서 구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왜 구조 초기에 민간 잠수사들의 활동을 (활용하기는커녕) 가로막았는지, 정부는 왜 구조보다 보도통제에 더 열심인지, 도대체 정부가 있기는 한 것인지 등등―을 먼저 캐물어야할 언론은 (소수의 마이너 매체들을 제외하곤) 이번 참사로 정권이 흔들릴까, 자신들의 그것의 일부인 기득권 체제가 무너질까 노심초사 중이며, 사태를 서둘러 덮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인 것만 같다.

상례가 된 예외상태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개탄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수사법이 아니다. 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아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용산참사 때도, 쌍용차 파업사태와 이후 해고자들의 자살이 줄줄이 이어질 때도, 천안함이 침몰하고 46명의 병사들―그때도 선장과 장교들은 살아나왔다―이 수장된 그 사건에 대해 몰상식한 조사와 발표가 이뤄질 때도, 혹은 4대강 사업 반대집회에서도, 나는 똑같은 소리를 들었던 바 있다. ‘이것이 나라인가?’ 아마 그런 분통 터지는 사례들의 목록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탄식―여기에는 나라가 없다, 우리에겐 국가가 없다, 세금을 걷어가고 의무를 부여하는 국가는 있지만 믿고 기댈 언덕 같은 국가, 불의를 호소하고 정의를 요청할 그런 국가는 없다, 혹은 아니러니 하지만, ‘이 사회에는 사회가 없다’ 등등―이 그저 탄식이 아니라 냉정한 객관적 실태라면 어떨까? 인간에게는 사회가 보이지 않고 사회(혹은 국가)에게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무시되는) 그런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정치적) 동물’로 살아가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사회라는 이름의 기괴한 자연―정글에는 정치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안에서 그저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 생존을 이어가는 (그러다 툭 끊겨도 어디 호소할 데조차 없는) 미약한 동물로 전락해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 아침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하는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억압된 자들의 전통은 우리에게, 우리가 오늘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가 상례(常例)라는 점을 가르쳐준다”고 쓴 바 있다. 오늘 우리가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이 ‘세월호 이후의 시간들’은 ‘있어선 안 될’ 일들이 내내 벌어져온 어떤 억압된 자들의 세계―아니 ‘세계 안의 비-세계’―에 우리가 눈을 뜨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게 될 ‘남겨진 시간들’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팽목항에서
항구는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혹은 갈리는, 경계에 자리한다. 경계 없는 공간인 바다와 구획 가능한 육지의 접점에 항구가 있다. 대지에는 노모스(nomos)가 있지만 바다에는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바다는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고, 경작도 불가능한 자연의 상징으로 간주돼 왔다. (또 같은 이유에서, 바다는 대지의 법들에서 풀려난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며, 바다 저 너머의 땅이나 섬은 우리의 탈-현실적 이상이 투영되는 곳이기도 했다.) 배는 그런 바다 위에 띄운 육지의 작은 조각이다. 하지만 배를 띄워주는 바다는 때로 그 배를 삼키기도 한다. 그럴 때, 항구는 사랑하는 이가 탄 배가 떠나고 그리운 이가 귀향하는 낭만적 장소가 아니다. 항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저주스런 곳으로 변한다. 사태를 더욱 고통스럽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삶과 죽음의 교차가 우리가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을 한참 벗어나 있을 때다. 만약 어선이 갑작스런 조류에 휘말려버린 거라면, 우리는 애통한 심정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호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이 여객선과 거기에 탄 사람들을 삼킨 것은 자연의 바다가 아니라 요령부득의 정글처럼 변해버린 한국사회라는 이름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혹은 배를 삼킨 것은 바다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들과 선생님과 승무원들의 생명을 집어삼킨 것은 더 이상 법도, 규범도, 정상도, 소통의 언어조차도 무너져버린 이 (사회 아닌) 사회인 것이다. 퓌지스와 노모스가, 자연상태와 법치상태가 구별불가능해진 예외상태―아감벤의 책들이 주제화하는 영역―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누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단단한 땅위에 서있고 결코 (아무런 구조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익사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아감벤을 떠올려야 한다면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은 지난 십여년 동안 (안토니오 네그리와 더불어) 국제 인문학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다. 발터 벤야민 연구자로 비교적 조용한 명성을 얻고 있던 그가 학계를 넘어서 갑작스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5년에 출간된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란 저작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1년 9.11 사태 이후 조성된 미국과 국제정치적 상황―예컨대 초법적인 관타나모 수용소나 ‘애국법’의 등장―이 그 책에 이미 예견과 비판의 형태로 선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이지만, 이때 ‘사케르’는 종교적 신성함이나 성인에 대한 숭앙의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법에 기술된 어떤 인간 존재로, 시민이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고 그의 주검이 희생제의의 제물로도 바쳐질 수도 없는 그런 (비)인간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가 로마라는 정치체의 한계 지점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어떤 사회든 그가 ‘호모 사케르’라고 말한 한계선상―삶과 죽음의, 인간과 비인간의, 사회와 비사회의―에 놓인 인간존재를 갖는다. 그러한 존재는 언뜻 예외적인 사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정치공동체의 구성적 부조리가 비춰지는 거울과도 같다.

물론 세월호에 갇힌 채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간 이들은 결코 호모 사케르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들이며 소중한 이웃들이다. 그러나 “그 ‘유감스런’ 죽음을 핑계로 ‘야만적인’ 울부짖음이나 ‘폭력적인’ 몸짓을 하며 ‘시체장사’를 하려고 들지는 마라!”고 협박하는 어떤 자들의 눈에 그들은 호모 사케르이며 한낱 벌거벗은 생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감벤이 주권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 ‘겨우 살아있음’ 정도로 치부하는 권력의 시선이 정치적 공동체를 수직적으로 갈라놓는 사태를 가리킨다. 문제는 그런 괴물스런 응시의 등장이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적 초과’―일종의 내적 필연성을 갖는 논리―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 아감벤이 인용하고 있는 법학자 칼 슈미트에 따르면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주권자의 본성은 그가 법질서를 합법적으로 정지시키는 역설적 ‘예외(비상)사태’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 참사라는 이 예외적 사건이 어째서 우리가 그 안에 놓여 있는 하나의 상례적 구조를 드러내는 사태인지를 아감벤의 사유들과 함께, 고통스럽더라도, 검토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익사한 자들을 다시금 망각의 바다에 묻어버리려는 자들의 손에서 구해내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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