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광군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해 방사능이 노출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보험처리 할까?

이런 종류의 보험 상품이 있을지 만무하지만, 엄청난 재앙 앞에 보험사는 두손두발 다 들것이고 사회는 일순간 통제 불능의 상태로 접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원자력발전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술적 측면을 차치하고라도 당장에 일상생활에 커다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어난 대규모의 정전사태는 이를 반증한다.

이렇듯 현대사회는 불확실한 위험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서 ‘위험사회’는 등장한다. 위험사회는 단순한 ‘위험 정도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위험이 대두했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발전과 문명을 가져온 합리성과 계산가능성의 ‘개가’라고 불렀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인류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위험의 원천이 되었다는 당혹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하여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위험사회를 어떻게 봐야하고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인간이 신을 중심으로 한 사고에서 벗어나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등장한 이후부터,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성은 신의 품에서 벗어나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인간 사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합리적 인간들에 의해 과학은 발달했고 그것은 근대사회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인간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였고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예컨대 의학의 발달은 질병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줄였으며 평균수명을 연장시켰다. 과학은 과거와 현재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 특정한 사실에 대한 위험을 줄였다.

그러나 과학의 지속적인 발달은 전에 없던 새로운 불확실성을 야기했다. 새로운 질병, 신기술에 따른 경쟁과 사고(事故), 생명의 손실이 점점 증가했다. 빈곤·실업 등의 경제적 파생위험, 환경오염·생태계 파괴·자원 고갈·난개발 등의 환경위험, 먹을거리 산업·유전자변형 작물·의약품 등의 부작용으로 인한 건강위험, 각종 재난사고 -구체적으로 오존층 파괴로 인한 지구 온난화, 신종플루,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쓰나미 등- 가 새로운 위험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된다.

과학이 성취의 영광이자 위험의 근원으로 등장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성찰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를 돌파하고자 한다. 기든스는 끊임없는 성찰성의 구현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합의와 신뢰의 도출을, 벡은 산업사회의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모색을 전개한다. 벡의 성찰적 근대화란 현대 기술과학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한계도 함께 인식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이는 과정이다. 나아가 근대적 삼권분립의 체계와 기술-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문가체계의 해체와 재구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위험’을 극복해 ‘안전’으로 도피한다손 치더라도 다른 메커니즘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바로 ‘안전 메커니즘이’ 그것이다. 국가에 의한 생명의 관리, 법 메커니즘과 규율 메커니즘과 동시에 작동하는 안전 메커니즘은 자연적 소여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억제 가능하지만 결코 완전히 억제될 수 없는 위험·장애요소들에 관여한다. 이 메커니즘은 출생률과 사망률, 질병, 전염병 등 육체의 제압과 인구의 통제를 통해 국가의 유지에 복무한다. 따라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생에 대한 열망은 다시 국가 속으로 포획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과연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늘 위험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으며 국가장치에 생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암울한 벽 앞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기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해답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무시무시한 위험을 차치하고라도 위험은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목도하고도 원전의 안전성만을 강변하는 위험한 정치인, 위험한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여성노동자를 외면하는 위험한 자본가가 그것이다. 이 위험 역시 우리의 손과 무관심으로 ‘만들어진 위험’이라는 데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점에서 합리성과 과학성이 야기한 위험과 동일하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위험, 우리를 에워싼 단단한 벽에 변형과 균열을 가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위험한 정치인과 자본가가 야기하는 위험 역시 보험처리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위험과 국가장치들이 야기하는 오염을 제거하고, 균열을 가하려는 정치적 기획과 실천에 동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De te fadula narratur)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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