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딛고 ‘패밀리터치’ 설립…“꾸준히 자신의 길 걸어라”

“나에게 삶이란 스스로 죽지 못하여 그냥 살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 (하지만 상담 후)늦은 나이에 시작한 영어공부와 새로 이루어 보려는 꿈과 목표가 생겼다. 봄볕처럼 이제는 제 2의 나를 꿈꿔 보고자 한다.”
어떤 이가 쓴 상담 수기 중의 내용이다.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갔던 곳은 비영리 단체 패밀리터치(Family Touch). 미국 뉴저지와 뉴욕에 위치한 패밀리터치는 한인들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한인 사회에 희망을 제공하는 이 단체를 우리 대학 박정숙 동문(영어영문학·80)이 이끌고 있다(미국 방식에 따라 결혼 후 남편 성인 ‘정’을 받아 현지에서는 정정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 세계를 무대로 꿈을 키운 시골 소녀
1960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난 박 동문은 외교관을 꿈꾸며 1980년 우리 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쉽사리 유학을 꿈꿀 수 없었기에 그는 좋아하는 영어를 할 수 있고, 외국에 나가 공부할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문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1980년 우리 대학은 박 동문이 앞만 보고 공부할 수만은 없는 조건이었다. 정부와 언론의 부조리한 모습에 실망한 그는 당시 많은 학생들이 그랬듯 학생 운동에 몸담았다. 당시를 회상하며 “데모하고 다니느라 수업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마냥 공부에 소홀할 수만은 없었다. 영어에 대한 갈망과 대학교 3학년 때 갖게 된 청소년 교육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춰야 했다. 박 동문은 “혼자 토플 공부를 하고, 미국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영어 듣기 공부, 영자 신문 읽기 등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그는 꿈을 위해 꾸준히 자신을 키워나갔다.

▲ 빌딩 청소부터 도우미까지, 고난의 미국 생활
1985년 졸업한 박 동문은 학부생 시절 사귄 선배와 1986년 결혼을 하게 된다. 박 동문은 결혼 후 곧바로 미국행에 오른다.
“나도, 남편도 가정 형편이 좋지 못해 일을 해야 했다. 남편과 함께 새벽에는 신문배달, 밤에는 빌딩 청소를 하며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항상 일을 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나는 육아도우미, 호텔 청소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토록 바랐던 유학 생활이었지만 바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생활하는 것부터가 녹록치 않았다. 돈을 버는 것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생활을 한지 4년여가 지난 후 박 동문은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에 따라 청소년 교육을 전공했고, 심리 상담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총 8년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생활고는 더욱 심했다. 특히 1996년부터 남편이 루게릭병을 앓게 되면서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학비, 남편 치료비, 생활비 등을 벌기 위해 한 번에 세 개씩 일을 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 고통 받는 청소년과 울고 웃으며
“뉴욕과 뉴저지 사회를 바라보며 어려움을 당한 청소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내 관심은 항상 청소년 교육에 있었다.”
때문에 박 동문은 2001년 패밀리터치를 만들게 된다(창설 당시 이름은 패밀리인터치였다). 한인 1세대를 대상으로 그들이 겪는 타지 생활의 어려움과 가정 문제를 어루만져주기 위함이었다. 이는 그들의 자녀인 청소년을 위함이었다.
“청소년 문제의 해결은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한, 두 번 상담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가정 전체를 대상으로 체계적 프로그램을 마련하려 했다.”
패밀리터치에는 부부, 부모, 청소년, 싱글, 시니어 등 총 10개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프로그램은 상담을 넘어 예방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박 동문에게는 문제가 생긴 뒤 하는 상담보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패밀리터치 10주년…꾸준한 행보로 역경 극복
“나는 좋은 행정가가 아니다. 때문에 재정을 지원 받고 하는 데 재주가 없다. 대신 그 힘을 상담하고, 사람 만나는 데 쏟는다.”
재정문제가 박 동문에게는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었던 탓에 패밀리터치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패밀리터치를 통해 새 삶을 찾은 사람들이 기꺼이 후원자가 돼 주었다. 지금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박 동문은 걱정하지 않는다. 항상 “걱정해도 돈이 나오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는다. 꾸준히 내 길을 걷다보면 돈은 생기더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담자는 그를 웃게도, 울게도 하는 존재이다. 하루에 힘든 사람 서너 명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치게 된다. 박 동문은 “상담가로서 ‘듣기’라는 작업이 너무 힘들다. 그들의 심정까지 모두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내담자가 다시 밝은 모습을 보일 때 박 동문은 가장 보람을 느낀다. 얼마 전 그는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만을 생각하던 고등학생을 상담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죽을 것 같이 느껴지던 아이가 만남을 이어갈수록 변화되는 모습에 행복함을 느꼈다. 박 동문은 “지금은 대학에 입학한 그 아이가 근처 식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지날 때마다 ‘Dr.정 때문에 저는 살았어요’라는 말을 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 “성급해 말고 계속 노력하라”
조금 늦은 나이, 스물일곱에 선택한 미국 유학길이었다. 게다가 생활고 때문에 서른이 넘어서야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박 동문의 삶은 우리네 시각에서 보면 늦깎이 인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청소년 교육이라는 이루고 싶은 꿈이 항상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꿈이 그녀를 낯선 미국 땅에서 살수 있게 만든 힘이었다. 소외와 차별이라는 이중고를 겪는 미국 내 한인 청소년들을 돌아 볼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박 동문은 신입생 시절부터 취업 공부로 내몰리는 요즘 대학생들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한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이라는 근시안적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조건 속에 있다"면서 "그러한 현실이 아쉽지만 그래도 자신의 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단기간에 이뤄내야 할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인생을 계획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뉴저지에서 시작한 패밀리터치는 3년 전 뉴욕에 새 지부를 세운데 이어 올해는 한국에까지 들어오게 됐다. 미국 내 한인 사회를 넘어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오늘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박 동문을 응원해본다.

박정숙 동문은 ▲1960년 전라남도 영광 출생 ▲1980년 우리 대학 영어영문학과 입학 ▲1991년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기독교 교육 전공 석사 ▲1998년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교육 전공, 상담 심리 부전공, 철학 박사 ▲1999년~2001년 뉴비전청소년복지재단 프로그램 디렉터, 상담가 ▲2001년~현재 패밀리터치 설립,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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