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비평 활동으로 한국문단 시선 집중

많은 사람들이 요즘 사회는 학벌과 인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더욱 치열해진 구직난 속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외적인 능력만 중시하는 것이 세태다.

하지만 지방대 출신에 전혀 제약받지 않는 이가 있다. 그는 우리 대학 출신이지만 중앙 문단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평가받는다. 문학 비평가 중에는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한다. 비결은 집안도, 인맥도, 경제력도 아니다. 단지 그것을 너무 재밌어하기 때문에 잘하게 된 것뿐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형중 동문(영문·86)이다.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유년시절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지 않았다. 네 형제 중 둘째로,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8명이 함께 살며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그가 당시 거주하던 송정리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어 자연스레 ‘거친 삶’들을 많이 보고 자랐다.

가족사도 행복하지 않았다. 장남이었던 형이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 쪽 다리를 쓰지 못해 그가 항상 챙겨야 했던 것이다. 그는 12년 동안 형과 함께 다니며 수발을 들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는 어렸을 적을 회상하면서 “뿌리 깊은 열등감에 ‘나란 존재가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유복하지 않았던 유년시절은 훗날 크나 큰 자산으로 돌아왔다. 남들이 쉽게 겪지 못하는 경험들을 한 것이 문학하는 데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문학한다는 것은 잘 믿지 않는다”는 말을 던졌다. 아마 아낌없는 사랑받으며 걱정없이 자란 이들의 삶은 단조롭다고 여긴 것이리라. 이는 “비참할수록 몽상가가 된다”는 그의 말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상처는 그를 내적으로 성장하게 만들었고 오늘날의 그를 있게 했다.

▲문학에 눈 뜨다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어머니께서 외가에서 가져오신 40여 권의 ‘세계 어린이 명작 동화 시리즈’는 장난감이 많지 않던 그에게 더없이 좋은 놀이 기구였다. 그는 한 학기도 채 걸리지 않아 그 책들을 다 읽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알아서라기보다 그것이 가장 자신을 기쁘게 했기 때문에 계속 책을 들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서석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사평역에서』의 곽재구 시인을 사제 관계로 만났다. 선생님이 주시는 칭찬과 상은 그가 “내가 잘하는 건 문학인가보다”라고 깨닫게 했다.

▲술, 연애, 학생운동 그러나 책
책밖에 모르던 그는 당연히 국문과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신방과를 가라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타협안으로 영문과를 선택했다. 영문과에 가서 영어도 하고 문학도 배우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이미 정해져 있어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중요치 않았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는 환경에 크게 제약받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그가 대학을 다닐 당시는 학생운동이 성행하던 때였다고 한다. 그는 1학년 때 주로 술과 연애로 방황을 하다가 2학년 때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선배들의 권유와 압박에 못 이겨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행동했다. 하지만 학과 학생회장을 지내 주도적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항상 질문도, 생각도 많았던 그다. 그는 “너무나도 단순하게 이념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사람을 보면 징그러웠다”며 당시의 소회를 털어놨다. 대학 내내 술, 연애, 학생운동 뭐 하나 빼놓지 않고 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군 복무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규율을 싫어하는 그인 터라 미루고 미루다 4학년에 입대했다. 대학 때는 사상 조류상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서적을 읽었지만 군대에서는 검열 때문에 반대 성향의 책에 손을 뻗었다. 그는 밤에 불침번을 서면서 책 읽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다음 불침번을 안 깨우고 3시간 씩 서 있기도 했다.

제대 후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해 석사는 95년, 박사는 98년에 수료했다. 그런데 학위논문을 쓴 건 2004년이라고 한다. 그는 “문학을 연구하며 알아가는 재미가 컸기 때문이지 그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폐업 위기 ‘청년글방’ 구해
그는 대학원에 다닐 당시 광주의 유일한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청년글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1998년에 그 서점을 인수했다. 서점 일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폐업 위기에 처한 서점을 살려야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서점에 상당한 빚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싫어 조교를 그만 두고 서점 운영을 직접 맡았다.

 

그는 서점을 인수한 후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전남대, 순천대, 광주대, 담양대 등을 돌며 일주일에 21시간씩 시간강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꼽는다. 그가 좋아하는 인문학을 원 없이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미나팀을 구성해 책을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하며 사람들과 공유하는 ‘그 일 자체’를 행복으로 여겼다.

그러다 2000년 봄 ‘문학동네’에 평론을 내 등단이 된다. 남들은 몇 년 걸리는 것을 몇 개월만에 이뤘으니 그에게 능력과 행운이 따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는 등단 소식을 들은 직후 소감에 대해 “초등학교 때부터 가져온 막연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 때 전화로 소식을 알려온 직원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글방 운영을 6, 7년 한 후 조선대 국문과 교수가 됐다. 교수 자체가 목표였다기 보다 문학을 하기 위해 유리한 직업이어서 택했다고 한다.

▲스스로 재미 느끼는 것을 하라
전남대 출신인 그가 중앙 문단을 넘나들며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전남대 출신 비평가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학적이라는 것은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고 하는 그의 말이 무섭기까지 하다. 그는 “아무리 겸손한 사람이라도 서울대 나온 사람은 약간의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의식을 깨는 방법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하게 되는 것 뿐”이라고 한다. 물론 사회적 편견도 존재하지만 스스로 울타리를 만드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일찌감치 내가 무엇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무엇을 하면 즐거운지, 오래 해도 싫증나지 않겠는지 등을 고민하라. 그것이 마음속에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재미’를 느낀 채 무의식 중에 계속 하게 되면 어느새 그 분야의 1인자가 된다.”

그의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서문을 보면 “내 글을 읽은 이들로부터 듣곤 하는 말 중 ‘재미있다’란 말을 가장 선호하는 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 그는 본인이 재밌는 것을 한다. 그로 인해 무의식을 깨 지역적 한계를 극복했고 이제 그의 글로 다른 이들까지 재미있게 하는 재주꾼으로 거듭났다.

김형중 동문은 ▲1968년 광주 출생 ▲1986년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입학 ▲1998년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인문사회과학 서점 ‘청년글방’ 인수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부문 ▲2006년 9월~현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4~2007년 『문예중앙』 편집위원 ▲2008 소천비평문학상 수상 ▲2008년 12월~현 『문학과 사회』 편집동인 ▲주요 저서로는 『단 한 권의 책』, 『변장한 유토피아』, 『소설과 정신분석』, 『켄타우로스의 비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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