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편에 서서 지역에 힘이 되어주는 든든하고 굳건한 ‘선생님’

작년 1월 15일 ‘여수MBC시민상’ 시상식이 있었다. 그 곳에서 고흥고등학교의 한 교사가 시민상을 수상했다. 수상이유는 지역의 현대사 진실규명에 앞장섰다는 것. 현재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진상조사위원장으로 지역민들의 역사 속 고통을 듣고 다니는 그. 오늘도 내일도 내 꿈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시민상의 주인공은 바로 박병섭 동문(국사교육·76)이다.

 


▲암흑기에서 버텨낸 희망적 대학생활
박 동문은 ‘꼬막 동네’로 알려진 벌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로 보성, 강진, 고흥으로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중학교 시절 신문 배달, 수험 잡지를 보급하며 용돈을 벌었고,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은사의 도움으로 학교 매점 관리 학생이 되어 납부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박 동문이 다니던 초등학교 도서관에는 책이 많았다.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도서관에 달려가 역사책을 신나게 읽었다. 신나게 읽었던 역사책 덕분일까. 그는 중학교 국사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고 말했다.

 “재밌는 국사 선생님이 아니었지만 내 머릿속은 항상 즐거웠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야기가 막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는 비석탁본을 하고 돌아다니는 남다른 취미도 가지고 있었다. 탁본 속에 있는 한문을 읽고 싶어 한문공부도 열심히 했었다. 그 비석과 관련된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역사를 사랑하게 됐다.

대학시험 면접관에게 그는 “새로운 교사상으로 시대를 앞서나가는 의식적이고도 굳건한 선생님이 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교사의 길을 걷기 위해 우리 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우리 대학에 다니던 1976년 3월에서 1980년 2월은 유신 말기, 실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는 “지도교수가 따라가지 않으면 소풍도 못 가던 시절이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둥그렇게 앉아 도시락을 까먹곤 하던 시절. 그 도시락 먹으려 모여 앉은 곳에도 경찰들이 접근해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시절. 그는 그 시절을 “암흑기”라 표현했다.

암흑기 속에서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흥사단 아카데미’ 라는 써클활동(지금의 동아리가 당시에는 써클이라 불렸다)으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당시 이념 써클이라 불렸던 ‘루사’와의 토론회를 여는 등 경찰의 눈을 피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결국 4학년 졸업 무렵 박 동문은 비밀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다 당시 학생사찰기구였던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관련자로 의심받아 서부경찰서에 연행됐다. 조사를 받던 중 10.26사태를 맞아 그는 풀려났다. 박 동문은 이 시기 자료 몇 점을 우리 대학 5·18 전시관에 기탁한 바 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그는 군대에 다녀와 정식 발령을 받은 이후 교육 운동 대열에 동참하게 되면서 두 번이나 좌천을 당하고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4년 6개월 해직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교사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고흥고등학교에서는 특이한 국사 수업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학생들이 선생님의 교실에 찾아와 수업을 듣는 ‘교과 교실제’가 그것이다. 이 교실(학교에선 ‘사회실’이라 부른다)에선 온갖 매체가 활용 가능하다. 실물 화상기, PC, 비디오기 등등. 그는 옛날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디지털 영상으로 바꾸는 작업도 틈틈이 하고 있다. 또 신문을 보면서 ‘수업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겠다’하는 것들은 모두 모아둔다. 그의 책장에는 모아둔 신문자료가 한 가득이다.

그는 대부분 농촌 학교에서 근무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농촌 학교가 문을 닫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터진다”고 말하는 그. 우리 사회의 희망은 농촌 살리기에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농촌을 살리지 아니하고는 여유로운 생활, 절대 느낄 수 없다.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겠나. 농·어촌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으로 안정적인 소득을 갖도록 하고 농어촌 학교를 살려 좋은 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는 학교 안에서 학교를 변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찾으며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학교의 모습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꿈꿔 나가고 있다.

 


▲지구적인 생각과 지역적인 행동
“억울한 죽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다. 목격자들을 찾아내서 그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근·현대 격동기에 그들이 겪었던 일들 가운데 우리 시대의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전남 동부 지역은 물론 전남 전역을 넘어 우리의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 중 ‘여순사건’이 있다. “학교에 얽매인 몸이어서 욕심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고 말하는 박 동문은 현재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진상조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별로 피해자를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고 목격자와 희생자 가족을 만나 그 증언을 채록하는 역할이다.

여순사건과 관련한 앞으로의 그의 계획은 더 많은 목격자와 희생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활자화하는 일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 듣지 않으면 앞으로는 영영 기록할 수 없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빨리 좀 듣고 싶다.”

그는 올해가 가기 전 피해자, 목격자의 이야기,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생생한 증언을 듣고 책으로 묶을 계획이다.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만이 아니라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사 교실’의 역사 선생님으로 활동하는 등 그 지역에서만큼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 동문. 그는 “생각은 지구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내가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그 지역에 풀어내 지역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 역사를 위한 최선의 노력이 아닐까. 그가 실천하고 있는 삶을 따라 눈은 세계를 보지만 두 발은 지역에 놓아 세계의 중심이 되어보자. 그가 자주 부르던 “보아라 젊은 가슴”으로 시작하는 용봉의 노래도 부르면서.

박병섭 동문은 ▶1976.2 순천고등학교 졸업▶1980.2.26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 졸업▶1980 고흥 봉래중,장흥고, 해남고, 고흥 포두중 근무▶1989.8-1994.2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태로 해직, 고흥지회에서 상근 활동▶1994 고흥 과역중. 진도실고, 고흥고, 순천남산중, 순천여중, 순천제일고 근무▶2003-현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진상조사위원장▶2007-현 전남대학교 역사(국사)교육과 동문회장▶2010.3-현 고흥고 근무▶2010.6-현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 문화재전문위원▶지은 책 『일제 강점기 벌교 지역의 교육운동 연구』(2005)▶엮은 책 『알고 싶은 고흥, 살고 싶은 고흥』(1992),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국사배움책』(1995), 『알수록 정드는 고흥』(2010)▶함께 지은 책 『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보고서』(2006), 『정의로운 역사, 멋스러운 문화』(2007), 『걸으면서 배우는 순천』(2007), 『벌교읍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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