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은 저항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 믿었다. 생각하면, 그것은 어린 시절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백성으로 성장했고 노년에는 해방된 나라에서 독재자와 맞서 싸워야 했던 철학자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기인식이었을 것이다. 억압에 저항할 줄 모르면 인간은 노예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를 가진 자들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참된 자유를 위한 저항의 마지막 단계라고 본 것은 남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었다. “내 대적이란 내 자신이 나가서 반사된 것이다. 나 속의 착취자 압박자를 없애라 그러면 밖에 있는 반대자가 자연 없어질 것이다.”―이것이 그의 말이었다.

▲ 지난 10월 정기 국정감사때 김상봉 교수가 비정규직 교수 등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개별적인 인간이나 국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 인간이나 국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국가이다. 그러나 같은 일을 전체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저항해야 할 억압자는 나 밖이 아니라 나 속에 있다. 우리는 자기의 권리가 남에게 침해받는 것에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자기가 남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피해자인 것처럼, 동시에 가해자가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나는 전남대 교수로서 일주일에 세 과목 아홉 시간을 강의하면서 같은 국립대학인 서울대나 부산대 교수들이 일주일에 두 과목 여섯 시간만 강의하는 것을 알고는 전남대학의 교수 처우가 형편없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이건 얼마나 과분한 호강인가? 칸트는 일주일에 적을 때는 너 댓 과목에서 많을 때는 여덟 과목까지 강의를 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그는 세계를 뒤바꾼 철학자가 되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내가 칸트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비정규 교수들 때문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도 칸트처럼 한 주에 일고여덟 과목을 맡아야만 했을 것이다. 한국 대학의 교수들은 비정규교수를 착취함으로써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교수들은 이런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번 학기 들어 새 기숙사가 완공된 뒤에 전남대 비정규교수노조에서 옛 기숙사의 하나인 홍문학사를 강사들을 위한 연구공간으로 제공해달라고 학교당국에 요구하고 나왔을 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전남대분회에서는 학교 게시판에 이 요구를 지지해달라는 요청을 올린 적이 있었다. 조회 수가 오백이 훨씬 넘었는데 동참한다고 답을 보내온 교수들은 한 달이 지나도록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나는 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한다는 것이 심히 부끄러웠다.
  학교당국은 빈 기숙사에서 어떻게 하면 수익을 올릴 수 있을까만 궁리하면서 비정규교수노조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학원생이나 외국인 유학생 또는 사대부고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새로 지은 기숙사도 다 채워지지 않았는데 누가 옛 기숙사에 들어가려 하겠는가.
  우리 사회는 어디나 가진 자들의 탐욕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홍문학사 일을 보면 대학 사회도 똑같다. 그러니 누가 그 질병을 치유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암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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