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커플에서 부부로, 해외 동문 커뮤니티 활성화되길

캠퍼스 커플에서 시작해 지금은 평생의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는 서인호 동문과 김유미 동문. 오랜 시간동안 함께 해서인지 “아는 사람들이 거의 교집합 안에 들어간다”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락없는 잉꼬부부임을 증명해줬다.

공대노래패에서 싹튼 인연, 둘 뿐이었던 대학생활

서인호 동문과 김유미 동문은 우리 대학 공과대학 노래패 ‘새벽울림’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지내다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군대 제대후 노래패에 들어갔다는 서인호 동문은 “단과대학 동아리라서 수가 많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족적인 분위기였다”며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좋고 생각들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김유미 동문 역시 “노래패에서 농민운동을 주로 했는데 학생으로서 순수하게 농민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고 덧붙였다.
군대 가지 전까지 학과공부를 소홀히 했던 서인호 동문은 군대 제대후 장학금 타는 재미에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자동차공학 계열로 입학해 산업 공학과를 선택했던 김유미 동문은 1학년 때 공학수학이라는 책을 받은 순간부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공계열이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서인호 동문과 김유미 동문의 대학생활은 두 사람을 이어줬던 ‘새벽울림’에서의 활동과 두 사람이 함께 지낸 시간들뿐이었다.

전공 살려 섬유회사로, 전공 무관 경찰공무원으로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서인호 동문은 전공을 살려 섬유회사에 입사해 2년간 원단개발팀에서 근무했다. 이후 해외 영업팀으로 옮겨 중동쪽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2000년부터 회사가 중국에 시장을 개척하면서 원단에 대해 잘 아는 인원이 필요했고 서인호 동문은 2001년 고민 끝에 중국 상해로 파견 나가게 된다.
한편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김유미 동문은 졸업 후 전공이나 학업 성적이 반영되지 않는 직업을 찾던 중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경찰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에 경찰이 된 김 동문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경찰인 백일 경비단에 들어갔고 이휘호 여사를 경호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여사님을 경호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는 김유미 동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동기부여가 됐고 그냥 사는 것보다는 어떤 확실한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회사의 시급한 요청 때문에 3개월 정도로 예상했던 파견 업무는 길어졌고 서인호 동문은 중국 상하이에서 근무하면서 직접 제품 생산에서 납품까지 여러 방면에서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나중에 여건이 마련돼서 개인 회사를 차리기에도 중국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서 동문은 한국에 있는 김유미 동문의 결정을 기다렸다. 결국 결혼한 지 2주 만에 김유미 동문은 휴직을 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경찰공무원으로서 중국에 건너가는 게 장래에 도움이 될 지 고민했다는 김 동문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면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국으로 가는 데 뜻을 굳혔다”고 말했다.

어려움도 있지만 만족스러운 중국 생활

당장 실무자가 필요해서 중국으로 갑작스럽게 파견된 서인호 동문은 처음에는 중국어로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에 통역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업무를 했다. 통역원을 통해서 업무상 필요한 내용을 전달하다 보니 말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년 정도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에서 오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나 싶더니 중국식 사고방식과 한국식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3시에 갑자기 호텔방에 공안이 들어온 일, 은행의 느린 업무 처리, 중국인 거래처 사장이 아침에 약속했는데 계속 길 위라고 하면서 결국 오후에 도착한 일. 서인호 동문은 “이전에 경험을 했더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무작정 부딪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올해로 중국에서의 생활이 6~7년째에 접어들어 적응이 된 서인호 동문은 여러 가지로 힘들 때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어려움을 극복해가고 있다. 서 동문은 “가족이 제일 소중한 거 같다”며 “회사 업무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집에 일찍 들어가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전했다.
서인호 동문을 따라서 상하이로 건너온 김유미 동문은 어학연수를 받은 후 상하이 교통대학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인호 동문과 김유미 동문은 중국생활에서 주는 어려움도 많지만 전반적으로 자녀 양육이나 직장 생활하는 데 있어서는 만족하고 있다. 두 사람은 밤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서인호 동문은 “나도 직장을 포기하기 힘든 상황이고 아내도 복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다”고 전했다. 김유미 동문은 “20대 때는 30대가 되면 취업에 대한 고민도 없고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30대가 되도 고민할 게 많은 것은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김 동문은 “30대이다보니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뚜렷한 목표의식 가지고 다양한 경험하길”

서인호 동문과 김유미 동문은 대학시절 다양한 경험을 못해본 것에 대해 가장 아쉬워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똑같은 일상 속에서 살아가기 보다는 아르바이트건, 해외여행이건, 새로운 일을 해볼 것을 권했다. 서인호 동문은 “졸업할 때가 돼서야 직업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1학년 때부터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그 목표에 필요한 경험들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생을 살면서 직업이라는게 엄청난 부분을 차지한다”는 김유미 동문은 “기업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김 동문은 “회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직업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만 있으려하지 말고 해외로 눈을 돌릴 것을 제안했다. 김유미 동문은 “해외로 나오면 지방대를 나오건 명문대를 나오건 모두 똑같은 코리안이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더욱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캠퍼스 녹지공간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쉬워

가끔 한국에 들어갈 때 학교에 가보면 녹지공간이 예전만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는 서 동문과 김 동문. 서인호 동문은 “2년에 한 번씩 가보면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던 것 같다”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녹지공간을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유미 동문은 동문 자격으로 우리 대학 동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인터넷사이트가 없어서 등록이 안돼 할 수 없이 자유게시판에 써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김 동문은 “해외 동문 커뮤니티도 학교차원에서 활성화 시켰으면 좋겠다”며 “해외 동문들의 경우 인터넷 상의 모임이 없는 경우가 많다보니 다른 사이트처럼 지역별 모임방을 만들어 줘서 동문들이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 화 기자 cookka@hanmail.net

서인호 동문은...
1992년 우리 대학 섬유공학과 입학
1998년 우리 대학 섬유공학과 졸업
1998년 태창(일경) 입사
2001년 상해 지사로 파견

김유미 동문은...
1996년 우리 대학 산업공학과 입학
1999년 우리 대학 산업공학과 졸업
2000년 경찰공무원 채용됨 (현재 휴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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