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두 번 ‘때려 치우고’ 사업가로 변신…인도네시아의 봉이 김선달



박인진 동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그와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동문들도 다 같이 입을 모아 “어떤 때는 독불장군 같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얼굴에는 오랜 세월 굴곡 있는 인생을 살아오며 쌓아 온 연륜이 묻어 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자신감과 강함이 느껴진다. 그는 “이제는 그저 조용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인생 목표다”고 말한다. 남들에게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인생의 목표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제껏 너무나 굴곡 있는 삶을 살아 온 그에게는 너무나 간절하고도 소박한 목표다.


제 2의 봉이 김선달, ‘대학생 박인진’

서러웠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박 동문의 부모님은 박 동문이 대학입학시험을 보러 가는 것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합격을 해 놓고도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닿아 어렵사리 우리 대학 토목공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 때까지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스무 살, 대학생이다. 뭐든 혼자 힘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박 동문은 하루에 다섯 번이 넘는 과외와 초등학교에서 탁구 코치를 하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1년간 모은 돈이 1백50만 원. 그의 사업가 기질은 여기서부터 발휘된다. 충장로 1가부터 5가까지 모두 뒤져 그 중 가장 싼 다방을 인수한다. 그의 전략은 ‘인산인해 전술’. 차 값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 인수하기 전에는 한가했던 다방이 북적북적 거렸다. 입소문을 타고 ‘진짜 손님’이 하나 둘 다방을 찾았고, 마침내는 복덕방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3백만 원에 다방 파는 거 어떠냐?” 요즘으로 따지면 웬만한 주식 투자나 펀드보다 훨씬 낫다. 원금의 2배에 보너스로 ‘뿌듯함’까지.
다방을 팔고 탁구장을 인수 한다. 평소 좋아했던 탁구도 치고, 돈도 버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이때도 사업 전략은 변하지 않는다. “수입은 별로 없었지만 친구들을 불러 모아 탁구를 치게 하고 ‘진짜 손님’이 오면 다 친 것처럼 하고 슬쩍 비켜줬다”고. 이런 그에게서 봉이 김선달의 캐릭터가 떠오르는 건 왜 일까.


화려했던 청년 사업가, 그리고 기회

대학시절 ROTC였던 박 동문은 우연치 않은 기회로 포스코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직장생활을 한지 2년쯤 되었을까. 한 달에 14만원을 받고 일하던 그 때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큰 무대에서 도전을 한 번 해봐야 한다”하는 생각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고 서울로 갔다. 아는 선배와 함께 금호 전자 부품과 관련된 공장을 차렸다. 그가 차린 첫 공장 이름은 모교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긴 이름, ‘용봉 산업’. 공장을 차린 지 6개월 만에 흑자가 났다. 당시 한 달 수입이 2백만 원이었는데 그 돈이면 당시에 포니Ⅰ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갑자기 많은 돈을 벌어서 그는 ‘건방져졌다’. 28살 때 웬만한 회사원들 연봉을 한 달 만에 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잘 나간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술도 많이 사주고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기고만장 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는 시절’이 1년쯤 됐을 때 10·26사건이 터졌고 그 후 1년 반도 못돼 금호 전자가 부도를 냈다. 그 여파로 ‘용봉 산업’도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후 한참을 방황하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동생이 만들어 준 기회를 잡아 쌍용 건설에 입사하게 되고, 입사 후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발령이 났다. 그렇게 그의 첫 번째 ‘잘나가던 시절’은 초라하게 막을 내린다.

‘영어, 영어, 영어! Oh, my God!’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는 감독관, 컨설턴트들과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중요한 직책에 있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How much is it?’과 같이 기본 생활 회화도 입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남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한다. 그 때 그는 현장 막사에서 천천히 걸어 나가 사막에 홀로 앉아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새벽 3시까지 매일 영어 공부를 했다. 다음날 만나 감독관에게 물어 볼 질문과 답변을 영어로 써서 준비를 했다. 1년간 외운 영어 단어만 해도 무려 5천 개. 그에게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1년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시간이다. 그는 “내 평생 태어나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 본 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고 그 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긴밀한 인간관계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박 동문은 수주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율법에 따라 ‘3일 내에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듣기도 했다. 협박을 듣고 한국으로 급히 귀국 해 서울 본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된다.

‘촌놈의 설움’ 느끼고 다시 인니로

서울 본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인도네시아의 ADB(아시아개발은행) 차관 공사 현장에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실적으로 수주를 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박 동문이 쌍용건설 경영이념상을 받게 될 것이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사에 있는 사원 중 70%가 서울대, 25% 이상이 고려대였고, 서울대 공대 출신의 사원이 경영이념상을 받게 됐다. 회사로부터 ‘배반’을 당했다. 그 때 박 동문은 “촌놈의 설움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나’일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일을 열심히 했다. 그 후 94년에 인도네시아에서 귀국을 한 후 진급 심사 과정에서 박 동문과 경쟁하던 서울대 출신의 사원만 진급이 되고 박 동문은 또 진급에서 누락됐다. 두 번째 배반, 서럽고 화가 났다. “14년 간 회사를 위해 해외로 나가 몸 바쳐 일한 건 나인데…….” 그 다음날 그는 “아, 정말 이건 아니다”는 생각으로 출근 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표를 썼다. 두 번째 회사를 ‘때려 친’ 순간이다. 박 동문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신념 하나로 사표를 쓴지 20일 만에 다시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그 후 그는 95년부터 지금까지 우여곡절을 거쳐 인도네시아에서 ‘PT Jaya Alam Sarana Bention’라는 상호로 골재·목재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숨 막히는 삶을 살아왔다. 설움도 당하고 시련도 겪었다. 그의 인생선은 출렁이는 파도 같다. 오르락내리락, 지금은 온갖 풍랑을 넘어 수평선에 다다랐다. 최고도 최악도 아니지만 해질녘 노을을 보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산다. 수평선 넘어 또 수평선이 있고 끝이 없는 것처럼 그의 인생도 언제나 시작이다.
자카르타=김수지 기자 myversion02@hanmail.net


박인진 동문은

1971년 우리 대학 토목공학과 입학
1975년 우리 대학 토목공학과 졸업, 포스코 입사
1977년 포스코 퇴사, 용봉산업 창립
1980년 쌍용건설 입사
1980년 쌍용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지사로 감
1994년 쌍용건설 퇴사
1995년 인도네시아로 건너 감
현 인도네시아에서 ‘PT Jaya Alam Sarana Bention’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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