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변호사를 보고 있으면 영화 속 정의의 사도를 보는 듯 한 착각에 빠진다. 영화 ‘공공의 적’에 나오는 설경구 처럼 불타오르는 정의감을 가진 사나이,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가진 사나이다. 평검사 시절, 그가 생각하는 사회 정의를 실현 할 수 없게 되자 ‘부장 검사만 검사고 평검사는 검사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제 손으로 검사직 사표를 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어찌 보면 법조계에서 ‘융통성 없는 검사’로 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부러질 지언정 휘지 않는 대나무와 같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올곧은 신념 하나로 지금껏 법조인 생활을 한 지 어언 45년 째. 그 때 그가 불의에 휘둘리지 않고 곧은 목소리를 냈기에 지금까지 건강한 법조인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전남대 법대 1회 입학, 최초 사법고시 합격

그는 우리 대학과 관련해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우리 대학 법대가 새로 생기자마자 입학 해 재학 중인 입학생 중에서는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졸업 후 군법무관으로 군 생활을 하고 전역 후에는 춘천 지방 검찰청에서 검사로 생활했다. 그가 검사 생활을 하다 보니 법전에 나와 있는 정의와 그가 생각하는 정의, 그리고 윗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달랐다. 차장, 부장 검사와 자꾸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다 결국 그 당시에는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제주 지방 검찰청으로 발령 나게 됐다. ‘유배인’ 이기홍은 ‘6개월만 있으면 다시 육지로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법조인 생활을 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때 그는 ‘부장검사, 차장검사만 검사고 평검사는 검사도 아닌가?’하는 생각과 함께 그 상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 정의를 실현 할 수 없다고 느껴 제 손으로 사표를 냈다.
 


현대사 주요 사건 무료변론, 인권변호사

그에게는 항상 ‘인권 변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마치 자신이 직접 당한 일처럼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무료 변론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발 벗고 나섰다.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진압한 사건인 ‘6·3 사태’와 관련된 사건, 유신 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한 김남주 시인 등이 관련된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8년 송기숙 교수 등의 ‘교육지표 사건’, ‘5·18 민중항쟁’ 관련사건 등 거침없는 무료 변론이 이어졌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자신이 그러한 사건에 대해 ‘아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료 변론을 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5·18 민중 항쟁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1980년 당시 광주지방변호사협회 회장을 맡게 됐고 엠네스티 지부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주변에서 5·18의 처참한 현장을 전하고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롯데백화점 근처에 있었던 터미널 앞에서 젊은 사람들을 물구나무 세우고 때리는 것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홍남순 변호사, 명노근 교수, 송기숙 교수 등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사태의 수습과 진정을 하려했지만 계엄군과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광주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전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몸으로 막자’는 생각으로 ‘죽음의 행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7일 무차별적인 발포를 진압하기에 그들은 너무 무기력했다.

 
“80년 5월 광주는 신군부의 ‘마루타’”

그는 5·18을 남들과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정의 내린다. “5·18은 신군부가 정권 획득을 위해 광주를 희생양으로 붙잡은,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그는 “5·18이 일어나기 한 달 전, 군 관계자로부터 ‘이기홍 변호사는 6개월간 피난 가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5·18이 일어나고 난 후에 그 말을 되새겨보니 5·18은 신군부에서 미리 짜둔 시나리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도 최후의 보루는 ‘전남’이었고, 끝까지 투쟁하는 곳이 ‘전남’이었다”며 “신군부는 정의감이 넘치고 끈기 있는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만들어 정권을 잡는 데 이용했다”고 전했다.

신군부 시나리오에서 이기홍 변호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송기숙 교수, 명노근 교수, 홍남순 변호사와 함께 감금됐다. 5·18 직후 상무대로 끌려가 영창에 수감됐다. 죄목은 ‘내란죄’. 속옷만 입혀놓고 보안대 지하 영창에 감금됐지만 ‘거짓 진술을 할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나중에 사면을 받긴 하지만 그 당시에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간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후 그는 5·18 관련사건 관계자들을 무료로 변론하기도 하고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2년에 걸쳐 맡기도 했다. “유족회, 구속자회, 부상자회 모두를 돕기는 어려워 충돌도 있었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 한다”고 회상했다. 이사장을 지내면서 5·18 국립묘지 조성에도 도움을 주고 5·18 기념재단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제시 했다. 이런 그는 “광주 시민들이 그 때 민주화를 위해 공헌 했으니 앞으로도 법에 의해 의사표시 할 수 있는 민주 시민이 되었으면 한다”며 특히 “전남대는 민주화를 이룩한 원동력이므로 여러 사상들을 두루두루 포용하고 눈을 더 크게 떠 넓게, 멀리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자리에서든지 당당한 전대인 되길”

그는 강진에서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한 번도 그 점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으니 더 천진난만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강점으로 여기고 시골 아닌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더 잘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는다”고 했다. 또 “그 당시 전남대의 위상과 지금의 전남대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전남대 졸업생으로서 누구 앞에 꿀려 본 적이 없다”며 “어딜 가든지, 무얼 하든지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인권 변호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는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도 “자부심을 갖고 사회생활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줄곧 올곧은 ‘정의’를 지켜오며 법조인 생활을 한 그는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식을 풍부하게 갖춰야 한다”며 “1학년 때 배우는 교양 과목이 특히 중요하고, 책을 많이 읽어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전했다.

그가 강조한 ‘상식’을 갖고 법조인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의 얼굴에 인생과 성품이 드러난다더니, 온화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정의’와 ‘평화’의 이념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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