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시절에는 정치도 하고 싶고, 외교관도 하고 싶고, 변호사도 하고 싶었던 꿈 많은 순수한 젊은이였다” 

“학부시절에는 정치도 하고 싶고, 외교관도 하고 싶고, 변호사도 하고 싶었던 꿈 많은 순수한 젊은이였다”

박정숙 동문은 우리 대학 영어영문학과(이하․영문과) 80학번 출신이다. 그가 미국에서 자원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화려하지 않은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이미지는 ‘모두를 이끌 수 있는 부드러울 것 같으면서도 강한 사회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박정숙 동문은 미국 뉴저지에 ‘패밀리 인 터치’라는 비영리 단체를 5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그는 1985년 영문과를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유학 와서 그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교육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신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게 된 데는 대학교 3학년 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인 그는 대학 3학년 때 기독교 집회에서 학문적 교육이 아닌 마음의 교육으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신학교에 가서 교육하는 것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미국에서 실현됐다. 현재 ‘패밀리 인 터치’는 뉴욕․뉴저지에서 살고 있는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 가족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정숙 동문은 “대학교 3학년 때 올바른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이 이뤄졌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5년 전 ‘패밀리 인 터치’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잘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다보니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1차적으로 중요한 환경인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교육을 했다. 또한 부모교육을 하니 행복한 가정을 이끄는 부모가 되기 위해선 부부가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됐고 그래서 지금은 청소년, 부모, 부부교육을 하고 있다.

그는 “보통 뉴욕․뉴저지에 있는 가정상담소의 95%가 가정에 문제가 생긴 후 중재역할을 하는데 그치고 있다”며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패밀리 인 터치’는 가정 문제 예방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한인 봉사단체의 경우는 대부분 미국자료에 바탕을 두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제가 있다”며 “한국 사람에게 맞는 어린이, 청소년, 가정교육 자료들을 만들어서 온 가족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역점을 두고 활동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실제 이혼의 위기에 처해있던 부부가 ‘패밀리 인 터치’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화목한 부부사이가 됐을 때, 결혼만 3번째인 여자가 또다시 이혼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여기서 상담 받고 정상적인 부부로 회복됐을 때, 삶을 포기하려던 사람들이 상담을 통해 삶의 의미를 회복할 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는 “상담 받으러 온 사람이 아픔을 이야기 할 때는 그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내가 함께 아파올 때는 힘들었다”며 “이렇게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일들로 육신이 힘들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들을 신경 쓰느라 정녕 자신의 아이들이 희생을 받는 게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는 “18살인 큰 아들 준용이가 지난해 어머니날 이런 편지를 썼다”며 보여줬다.

‘…예전엔 엄마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않을 때 짜증을 냈어요. 그러나 엄마는 아랑곳없이 긴급 상담이 있을 때면 집에 늦게 오시곤 했어요. 그러던 중 엄마는 나에게 사람들이 엄마의 강의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고 엄마에게 감사해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선 엄마의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과 엄마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며 그는 엄마를 이해해주는 아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미국에서 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있었다. 1996년 남편이 온몸의 근육이 점점 위축되는 루게릭병에 걸린 것이었다. 남편의 병간호를 하며 병이 호전되기 바랐지만 불치병인 루게릭병에 걸린 남편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병상에 있을 때 ‘패밀리 인 터치’를 시작했다. 주위에선 왜 힘든 일에 뛰어드냐고 말렸지만 그는 이일을 해야 할 것 같아 이 단체를 운영했다. 그는 “비영리 단체이기 때문에 자금을 마련하는 부분이 어려웠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었다”며 “감사하고 보람될 뿐이다”고 말했다. 

‘삶도 죽음도 선물입니다’라는 삶과 신앙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그는 책을 쓰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됐다며 1980년대 초에 대학생이었던 때를 회상했다. 그는 “그 때를 돌아보니 입학해서 졸업 할 때까지 공부보다는 데모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며 “사회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대학생이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개인적인 성장을 하지 못했던 대학생이었다는 것”을 대학 생활의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후배들에게 대학 4년의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대학 시절 어떻게 하면 균형 잡힌 성장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말 짧지만 귀한 4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준비했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에 30~40년 후를 좌우한다. 때문에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생각하며 열심히 놀기도 하고, 목표를 설정하기도 해야 한다. 삶의 방향에 대한 목적을 설정하는 시간을 가져서 먼 훗날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더 큰 미국으로 떠나 공부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서 일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그의 삶이 큰 세상, 큰 꿈을 가지고 준비하는 후배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흔하지만 정말 의미 있는 말인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아왔다”며 “어려움도 뚫고 나가려는 생각만 하면 뚫리는 것”이라며 “이러한 생각이 내 삶속에서 실천 됐고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설사 쓰러진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오뚝이라 생각한다는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자부했다. 

대학생인 기자들을 보며 ‘젊음’을 부러워하는 그였지만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젊은 기자들 못지않게 아름다운 40대였다.

/이수현 기자 1004gamsa@hanmail.net


박정숙 동문은…

․ 1980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과 입학

․ 1985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

․ 2001년 비영리 단체인 ‘패밀리 인 터치’ 개원

․ 현재 ‘패밀리 인 터치’ 원장, Southern Seminary New York Extension 교수

․ 책 ‘삶도 죽음도 선물입니다’ 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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