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총학생회가 최초 등장한 이래, 학생운동의 토대가 마련된 1960년대, 1970년 유신 반대, 5월 운동 1980년대, 저조한 관심으로 학생 자치의 위기를 겪고 있는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70년간의 총학생회의 모습은 시대에 맞춰 변해왔다. <전대신문>은 이 기획을 통해 우리 대학 총학생회의 역사를 돌아보고 학생 자치 기구가 나아갈 미래를 그리고자 한다. / 엮은이

5년 만에 부활한 ‘80 총학’, 지도부 연행으로 다시 와해

▲ 1980년 4월 총학생회 선거공고. 5월만의 직선이었으며 선거 결과 박관현이 당선됐다.

 

▲ 1982년 10월 12일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사망하자 학내에서는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3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됐던 학생들의 복학과 ‘전남대 교육지표사건’으로 해직됐던 명노근 교수 등이 복직됐다. 학생들은 새 학기 시작과 동시에 총학생회의 부활을 목표로 학원 자율화 운동을 전개했다. 3월 6일 31개의 서클(현 동아리) 대표가 모여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공청회를 열어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학칙 개정, 기구 결성, 토론을 진행했다. 또한 총학생회칙 초안을 마련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조직했고, 그 결과 4월 9일 총학생회장 선거가 실시됐다. 이로써 5년 만에 총학생회가 부활했으며 제15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 박관현이 당선됐다. 이후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학원 자유와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학내 민주화 운동이 전개됐다. 5월이 되자 민주화 운동은 학내 문제에서 신군부 세력에 반발하는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더욱 격렬해졌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24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고, 우리 대학은 계엄군의 점령하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학생회와 단과대 회장단 대부분이 연행되며 총학생회가 와해되었고, 그해 8월 제6대 학도호국단이 출범하며 다시 학도호국단 체제로 돌아갔다.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5·18)의 여파로 학생 활동이 크게 위축돼 주로 학생 복지에만 초점을 두었고 정치적인 활동은 배제됐다. 박관현이 사망한 1982년부터 1984년까지 학내에서는 연일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와 총학생회 부활 운동이 일어났다. 1984년 4월 2일에 시행된 보궐 선거에서 총학생장으로 이석형이 당선되었지만 여전히 학도호국단 체제였으며 학생활동은 제약받았다.

80년 중반, 총학생회 주도 아래 활발한 민주화 운동 전개
80년대 중반에 들어서 학생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전두환 정권이 국내외 비판을 완화시키기 위해 강압 정치를 일부 완화하면서 학내에 자율화 바람이 다시 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5·18 이후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던 학생 운동은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첫 출발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출범이었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는 △학도호국단 폐지 △총학생회장 및 학생회 간부 직선제 △학내 언론 자율성 보장 △학생 자치 기구 인정 등을 요구하며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다. 그 결과 1984년 9월 총학생회 직선제가 부활했고 총학생회장과 단과대 회장 선거가 11월 16일 실시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제17대 총학생회는 그간 군사독재의 잔재였던 학도호국단 체제가 무너지고 대표적인 학생 자치 기구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1985년 4월 2일에는 최초의 총여학생회가 출범했고, 15일 전국 최초로 학교 당국의 동의 아래 ‘총학생회 회칙’을 마련하여 제정 공포했다. 1987년 경찰의 고문과 폭행으로 박종철 열사가 숨지고, 최루탄을 맞아 이한열 열사가 사망하자 총학생회는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기말시험의 무기한 연기를 선포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선언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1990년 자주적 학생회 건설과 비운동권 학생회의 출현
6월 항쟁 후 맞이한 1990년대 총학생회는 학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학생의 요구를 수렴하기 위한 사업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1년 23대 총학생회에서 처음 건설된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전학대회)이다. 전학대회는 학생들이 학생회의 주체로 서게 되는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학생들의 결정 없이는 학내의 어떠한 사업도 진행하지 않겠다는 총학생회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후 1998년, 최초로 비운동권 후보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며 큰 이변을 가져왔다. 총학생회 부활 이후 약 10년 동안 총학생회장은 운동권 출신 후보들이 맡았으며, 특히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이 학생운동단체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을 연이어 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년 동안 연이어 비운동권 후보자가 당선된 것은 운동권 출신 학생회가 학생들의 일상적 관심사나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에 미흡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1999년 11월 진행된 제32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다시 한총련 계열의 변재훈이 당선되며 2년간의 비운동권 학생회는 막을 내렸다. <다음호에 계속>

사진 <전대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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