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는 여전히 내전 중인 나라들이 있고 적지 않은 국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사실상 난민이 된다. 머물 수 없으니 떠돌 수밖에 없는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우리는 또 그럭저럭 살아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지 한 달째. 거의 모든 매체가 연일 이 뉴스를 보도하고, 방송국에 따라서는 우크라이나 도심 한복판에 카메라를 달고 동영상 공유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 중계도 한다. 이쯤 되면 방송국은 방송 윤리 따위는 내팽개친 채 전쟁을 게임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규탄해도 카메라는 아니, CCTV는 꺼지지 않는다.

2년 넘게 우리는 ‘코로나’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바이러스는 가장 약한 사람들의 숨통을 조였고 적지 않은 이들의 생을 지웠다. 앞으로의 전쟁은 그와 같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형태로 치러질 줄 알았다. 이를 테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맞서는 백신 개발이나 (‘모두를 위한’은 논외로 치더라도) 보급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탱크를 밀고 들어가 포격하는 옛날식의 전쟁을 일으켰다. 외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국경을 넘어 탈출했으며 군복무 경험이 전혀 없는 시민들이 마을과 도시를 지키려 무기를 들었다 한다. 또한 푸틴의 전쟁 명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쟁에 동원된 러시아 군인 상당수는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징집병이라 한다.

무고한 민간인 사상을 생각하면 화가 나고 안타깝고 무서운데 출근하고 일이 밀려들면 관심은 뒷전으로 밀린다. 일하는 간간이 자막 뉴스를 읽지만 길게 보기도 어렵다. 보면 또 어쩔 것인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한국) 전쟁의 폐해를 배웠다. 전쟁이 파괴한 도시와 경제와 민생은 더디게라도 복구되지만 전쟁의 기억만은 예외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때론 한없이 연약하다. 고엽제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몸이, 매주 수요일마다 여전히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할머니들의 고단한 삶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그 증거고 실체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현실보다 더 강력한 징표가 있을까. 요는, 한국은 전쟁을 물려받은 유산처럼 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덫으로 변한 결정적인 계기를 1차 세계 대전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 전쟁은 유럽에 국한되었고 유럽도 전부는 아니었으니 사실 세계 대전이란 말은 가짜지만, 그럼에도 ‘세계’란 말이 들어가면 더는 국지적일 수 없고 그 재앙이 세계에 미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전쟁의 시간이 깊어지자 서방 세계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도 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습한 초기엔 각국은 코로나 대 유행 시작 때처럼 자국의 빗장은 걸어 잠근 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때려눕히는 장면을 숨죽여 지켜봤다. 미국은 연일 러시아에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했을 뿐, 이른바 강대국들은 러시아가 작은 나라에 폭격을 해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제3차 세계 대전을 피하기 위함이라 했지만 쿤데라에 기대면 저 이유는 절반만 사실일 것이다. 강대국들은 이미 ‘세계’란 말을 썼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지구촌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 전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휴대전화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우크라이나의 고통을 실시간 중계로 본다. 폭격으로 부서진 아파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겁에 질린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숨이 끊어질 듯 우는 아이의 눈물범벅인 얼굴을 본다. 혐오가 극에 달해 폭발한 방식이 전쟁이라면, ‘전쟁 뉴스’를 보고 읽는 행위로 각각의 슬픔과 혐오를 키운 우리는 이 전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전쟁은 끝나겠지만 상흔은 불가피할 것 같다.

김민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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