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투명성’이란 무엇인가?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지금까지 긍정적으로 인식해 온 ‘투명성’에 대한 개념을 다양한 시각으로 재조명한 철학 에세이다.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병철 교수는 이미 2012년 『피로사회』를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인문학적 통찰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그가, 『투명사회』를 통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디지털화 된 사회에서 모든 것이 ‘투명’해짐으로써 ‘디지털 통제사회’가 되어가는, 이른바 ‘투명성’에 관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정치·사회·문화에서 투명성을 강조한다. 정치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탈세와 같은 불법을 막기 위해, 교육현장에서의 공정한 평가를 위해, 가족과 연인의 신뢰를 위해 우리는 ‘투명성’을 요구한다. 투명사회는 모든 것이 안전하게 모두에게 공개되는 것으로 비밀스러운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폭로사회’다. 저자의 말처럼, 현대인들은 이러한 투명성이 더 많은 정보의 자유와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개인들 간에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는 믿음이 유행함에도 우리 사회는 점점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투명성’이 진실 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회의 발전을 저해시킨다고 언급한다. 그는 ‘투명성’에 대해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하여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곧 획일적인 사회를 만들어낸다고 예고한다. 

  이 책은 총 두 편의 에세이 ‘투명사회’와 ‘무리 속에서-디지털 풍경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투명사회’에서 저자는 투명성이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작용하면서 낳은 여러 가지 부작용의 사회적 현상을 긍정사회, 전시사회, 명백사회, 포르노사회, 가속사회, 친밀사회, 정보사회, 폭로사회, 통제사회로 명명하여 분석한다. 각 사회현상의 기저에 투명성을 이데올로기화하는 현대사회의 특징이 깔려 있음을 알려준다. 2부 「무리 속에서-디지털 풍경들」은 현대사회가 빠르게 디지털화되면서 어떻게 투명사회가 구축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디지털 투명사회의 문제점을 들추는 일은 결국 디지털 투명사회가 인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것이다.

투명성의 위험

  내밀한 것, 비밀스러운 것이 존재하지 않는 투명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자발적으로 노출한다. 특히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 스토리, 트윗,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일상, 감정 등을 스스럼없이 주체적으로 게시한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자신의 친한 지인이 SNS를 하면, 자신도 SNS를 하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자발적 의지에 의해 SNS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및 혹은 사회와 동화되려는 경향이 강해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SNS가 소통과 공감을 통해 신뢰를 얻기 위한 주체적 공간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인터넷 매체를 비롯한 각종 공간에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시키는 것은 어디까지 ‘투명성’의 범위로 인정할 수 있을까? 과연 현대인들은 투명하게 자신의 생활을 공개하는 것인지, 어느 범위까지 공개해야 올바른 투명성의 범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투명성의 범위를 논하려면 투명하다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투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먼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범위 한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다음으로 타의에 의한 투명성이 아닌 자의적으로 나를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가가 주된 변수로 작용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을 보면,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투명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잘못된 정보 공개나 조작된 수치, 은밀한 사생활 등은 투명성으로 인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사례들이 아닐까.

  저자가 주장하는 투명사회의 또 다른 병폐는 ‘전시사회’다. 백화점의 쇼윈도에 전시하듯 사람들 앞에 감추어진 것 없이 모든 것을 전시한다는 것이다. 전시사회는 ‘투명성’의 추구로 비밀이 사라지고 결국 모호함도 신비스러움도 사라지는 명백사회이자 폭로사회다. 개인의 모든 기록이 디지털로 기록되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감시 표적이 된다. 이에 저자는 투명사회에서는 장기적인 비전이 존재할 수 없고 단기적인 정책만이 난무할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투명사회는 ‘포르노사회’이라고 한다. 포르노사회라는 말은 포르노그래피에 비유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날것 자체의 적나라한 접촉을 의미한다. 결국 저자는 투명사회가 서로가 서로를 안전하게 규제하는 통제사회라고 비판한다.

디지털 판옵티콘

  ‘투명사회’는 푸코가의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감시체제인 ‘판옵티콘’을 연상케 한다. 그는 디지털 시대의 투명사회가 디지털 판옵티콘을 구축하고 있으며, 투명사회의 위험성은 디지털 판옵티콘의 구축이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성’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은 소수의 감독자가 자신은 노출시키지 않은 채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을 말한다. 현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판옵티콘이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투명해질수록 사회는 더 안전하고 견고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CCTV 설치를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사람이 사람을 감시해야 하는 형태였다.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당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의 눈을 통하지 않고도 누군가를 감시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CCTV는 진범을 잡거나 여러 가지 사건 해결에 유용한 점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전에 회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도처에서 감시하고 감시받는 것이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이 기술과 연계되면 인간은 기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만의 공간인 SNS에 글을 올리거나 사진을 올리더라도 도처에 눈이 있어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일례로,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는 야구 경기를 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할 수 있도록 댓글을 다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서로를 감시하면서 서로를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더욱 고착화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투명한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가 감옥에 갇혀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사회가 제공한 혜택이라고 착각한다. 우리에게 진정 투명한 사회는 무엇일까? 온갖 부조리가 난무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한병철은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의 사회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의 존재를 들여다보게 하는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공동체가 불가능한 투명사회에서 벗어나 “연대와 친구를 통한 우정의 공동체”를 다시금 건설하자고 제안했던 저자의 말처럼, 투명사회가 아닌 서로를 신뢰하는,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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