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장유진 기자
바디우는 오직 무매개적인 직접성만이 군림하는 작금의 민주체제를 언젠가 사라져 버릴 역사의 짤막한 토막 이야기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는 플라톤의『국가』8권의 언급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주체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나와 타자 사이에 인간적 동일성에 입각한 평등은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적 동일성이라는 보편성은 각자의 개별성을 존중하기 위한 전제이다. 그런데 불평등한 자와 평등한 자 사이에 세워진 평등은 화폐원리와 다를 바 없다. 확실히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정당을 통한 대의체계나 대표자를 선출하는 의회주의 등과 같은 아주 세련된 바탕과 외양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만물의 등가성을 공준으로 삼는 이 체제는 세계를 구축하는 차이―진리와 의견(doxa)의 차이와 같은―에 족쇄를 채우고서, 종국에는 순환의 질서가 화폐유통의 질서임을 그리고 축적의 질서가 자본의 질서임을 천명한다. “민주주의적 인간은 구두쇠 노인과 젊은이를 접붙인다. 젊은이는 기계를 돌리고 노인은 이윤을 금고에 쟁여넣는다”(『민주주의는 죽었는가?』, 2010). 이 체제 속에서 그 어떤 세계가 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젠가부터 이 체제가 배분하는 사회구조에, 불가역적인 명령처럼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강요되는 고정불변의 칸막이들에 너무 익숙해 있다. 노동자, 주부, 지식인, 회사원 등의 호명에 너무나 친숙해 하며, 이 지위들이 동반하는 시간, 공간, 정체성, 세계를 보고 수용하는 태도, 존재방식, 말하는 방식, 행동방식 등을 체화해서 마치 자동인형처럼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 조건의 상수적인 요소가 정녕 사라진 것인가? 바다우가 말하는 코뮌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배제와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인민의 삶과 분리된)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된 정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 인민의 역사적 삶과 동질적인 사람들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민주주의는 죽었는가?』, 2010). 이념도 원칙도 없는 임기응변 속에서 지배를 공고히 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욕망) 외에는 모든 것을 망각하는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 모나드(monade)로서의 개인들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바디우는 이 개인들의 자각을 촉구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윤택함의 상징물로서 제시하는 영원한 현재라는 소비의 시간, 향락의 무한한 잠재력에 매달리는 탕진의 시간은 곧 소외의 시간임을 말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1884년『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새로운 생산 양식 아래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세 가지의 소외, 즉 생산물과 활동 그리고 존재로부터의 소외를 지적했었다. 그래서 바디우는 소외되고 예속된 개인들이 아닌 해방의 주체들로 구성된 공동체, 이를테면 공동의 이데아와 공동의 기획, 그리고 참다운 정의가 존재하는 인간들의 결사체를 희원하면서 모두가 철인왕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존재, 사건, 진리, 주체는 바디우의 철학적 체계를 횡단하는 개념들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철학적 범주에 대한 혁신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극복을 위한 메타철학적인 포석이다. 그 통로 중에 하나가 플라톤주의의 복원이다. 그렇다고 바디우가 곧이곧대로 전통 철학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있어 바디우는 세잔을 닮았다.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색의 진동과 빛의 찬란함을 승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대기의 효과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 작품들에 내재된 불안정성을 지양하고자 했다. 세잔은 과거의 기법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푸생의 작품에서처럼 고전주의적 회화에서 관찰할 수 있는 구성의 견고함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가 무수하게 그리는 정물화들은 소묘와 색가(色價)를 동시에 포함하는 색의 전조(轉調)나 다채로운 광채(색상)에 대한 교육학적 자료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통해 그토록 염원했던 고전주의적 견고함과 견줄만한 고유의 입체감을 완성할 수 있었다. 미술의 새로운 존재방식이 세상에 제시된 것이다.  
  
바디우의 존재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진리와 자기동일적인 주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통 철학의 범주들의 재건을 시도한다.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그가 집합론에 의지하면서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적 일자(一者)를 부정하는 존재론을 주장하는 것에 다소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모순적인 주장이 아니다. 바디우가 존재는 비정합적인 다수이고, 이 다수 속에 공집합(공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그의 이론적인 포석이다. 공백은 폐쇄된 전체가 아니라 새로움을 낳는 열린 장소이다. (부조리한) 존재의 질서를 위반하는 무엇인가가 발생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건이며, 이 사건이 진리를 만들어낸다. 진리가 유통하는 과정과 함께 주체도 출현하게 된다. 사건은 주체를 구성하도록 (주체를) 소환한다. 진리의 과정이 이처럼 탄생된다. 사건적인 잉여적인 부가물의 관점에서 상황을 사고하는 충실성은 철학적 개입과 실천을 믿는 그가 가장 열망하는 결론인지 모른다.  

사건은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지식의 내부에 구멍을 내는 과정이다. 사건, 이 ‘예외의 시니피앙’은 기존의 상황이나 제도화된 지식을 폐기시키고 다른 것의 도래를 알린다. 갈릴레오의 물리학과 함께 2천년 이상 지속돼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이 폐기되었다. 이처럼 사건을 통해 하나의 단절이 성립되며 새로운 존재 방식이 발생된다. ‘쇤베르크’라는 이름의 음악적 사건에 충실했던 베르크와 베버른은 마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세기말의 신낭만주의 음악을 계속할 수 없었다(『윤리학』, 1993). 사도 바울은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리스적 담론과 유대 담론을 뛰어넘는 보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적 담론을 만들어 낸다(『사도 바울』, 1997). 이처럼 사건은 우연적이며 어떠한 법칙성도 따르지 않으며 이전에 관찰할 수 없었던 잉여, 이를테면 기존의 존재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은 어떠한 비정상적인 것의 출연을 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사건에 개입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다수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발생하는 사건을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부분은 바디우 철학의 약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술 또는 사랑의 영역이건, 정치 또는 과학의 영역이건 도처에 잉여의 이름, 정원외적인 이름, 이름-없음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니고 있는 사건들이 산재하다. 다시 말해 사건의 존재를 규정하는 개입의 필요성이 항상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식별 불가능한 것, 결정 불가능한 것을 상황 속에서 식별되도록 하는 지속적인 충실성의 절차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따라서 주체적 실천은 사건 속에 내재된 진리를 진리로 추출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건에의 충실성, 진리에 대한 옹호와 그것을 새롭게 전유하고 사유하는 주체만이 알려지지 않는 것을 명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진리의 과정에서 명명될 수 없는 지점을 규정하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주체들이 많은 난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이미지(스펙타클)를 양산하는 테크노유토피아 시대를 추동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매스미디어, 컴퓨터 과학을 통한 지식의 외화 등은 개인의 지식 습득을 방향지우고, 마치 상품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처럼 지식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다. 우리는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거짓) 표현 주체들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이들은 스펙타클의 충실한 추종자들이며 미디어, 시뮬라시옹의 세계, 또는 소리, 이미지와 문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비트와 디지털 이미지에 하부기초를 둔 정보이미지에 매료되면서 자신의 감각적?심리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바디우가 염원하는 합리적 주체로서의 해방된 인간과 보편적 정신에 입각한 사건의 역사는 요원한 것인가. 그래서 그는 권력의 잔혹함을 은폐하기 위한 이미지들의 외설(猥褻)에 대한 경계를 촉구한다(『현재의 포르노그래피』, 2013). 자본의 또 다른 이름인 스펙타클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든 사회적 행위들을 포획한다. 도시의 구획에서 정당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서 개인의 내밀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실이 표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는 파국의 원리이다. 공동의 이데아를 경시하는 미시정치의 인간들, 파편화된 주체들이 넘쳐흐른다. 바디우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대들은 사건이 아니라 시뮐라크르를 쫒으면서 충실성이 아닌 배반을 선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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