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5월이 찾아왔다.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로 인해 꽃봉오리를 피워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수많은 꽃들을 생각하면 눈물과 한숨만이 나올 뿐이다. 이런 대형 참사가 있을 때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당위적인 선언만 난무할 뿐이지 실천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어른들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자괴감이 든다.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많은 지역 축제와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이 상황에서 고민해볼 점이 음악의 기능에 대한 것이다. 음악은 늘 즐겁고 기쁨이 충만한 것만은 아니다. 음악은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기능을 하고 실의에 빠진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하는 기능을 한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했던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를 취소시키려는 무언의 압력은 음악의 기능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아니, 음악을 통해 분노가 증폭되어 폭발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국가에서는 나라의 정체성과 주권을 선포하는 세 가지 상징으로 국기(國旗), 국가 문장과 더불어 국가(國歌)를 지정하는 전통을 세우기 시작했다.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나 프랑스 국가인 <마르세유의 노래> 등은 당시 많은 국민이 유행가처럼 부르던 친숙한 노래가 국가로 지정된 것이다. 국가는 그 나라의 역사와 사상을 담고 있기에 이를 통해 그 나라의 정체성을 외부로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집단의 단결력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음악의 상징성으로 인해 모든 공동체 조직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노래를 만들기 마련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지 않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방침이 논란을 빚고 있다. 국가보훈처장은 “애국가도 국가로 지정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곡 지정을 외면했다. 애국가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국가로 지정돼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애국가를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아무도 없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확인 결정에서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건 관습헌법에 해당한다며 ‘태극기, 무궁화, 한글, 애국가도 관습헌법으로 국기, 국화, 국어, 국가의 지위를 갖는다’고 했다. 아마도 국가보훈처장만 이런 관습헌법에 대한 ‘관습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가보다.

국가의 모든 기념일에는 이를 상징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법적으로 기념곡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 노래는 기념일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국무총리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관련하여 “국론 분열이 우려된다”고 했다는데,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은 기념곡 지정을 기피하는 세력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평화 · 민주 · 애국의 5·18 정신을 상징하는 숭고한 노래이다. 이를 기념곡으로 지정하기 싫은 이유는 이 노래를 통해 5·18 정신이 강화되고 집단의 단결력이 강화되는 것을 저어하는 이들의 두려움 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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