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체제와 치열하게 싸웠던 시절이었지.”
1974년 4월 9일 광주. 우리 대학에서는 유신체제 반대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스쿨버스 안에서는 유인물이 나눠졌고 1교시가 끝나는 타종이 울리면 본부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하지만 사전에 이를 알아챈 형사들은 주도자를 잡는다는 명목아래 학교로 들이닥쳤다. 이 사건을 전국민족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라 부른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으로 전국의 1,024명의 학생들이 연행됐고 구타와 고문을 거쳐 253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됐다. 검찰은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1975년 4월 9일 김용원 등 8명을 사형판결이 내린지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했다.
당시 우리 대학에서는 18여명의 학생들이 민청학련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 중 김상윤(국어국문), 유선규(수학교육), 최철(농업경제) 동문을 지난 7일 만나 생생한 상황을 들어볼 수 있었다.

▲ 왼쪽부터 유선규, 김상윤, 최철 동문

유신체제 저항의 첫 시작, 광주
“정부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나오면 술 먹다가도 돌아봤어. 대한민국 자체가 감옥이 된거야. 학생들은 데모할 수 없었지. 1972년도 10월, 유신체제가 발표되고 12월 김남주와 이강이 ‘함성’과 ‘고발’이란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어. 그 사건이 유신체제에 대한 첫 도전이었지.”

‘함성지 사건’ 재판을 보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재판장으로 찾아갔다. 군 제대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김 동문은 군대에서 받은 교육들로 반공의식이 가득 차있었지만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남주가 간첩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간첩이라 불리는 놈들은 당당히 아니라고 말하는데 되레 재판관들이 제대로 말 못하는 분위기였어. 국가도 믿을게 못되겠구나 그때 느꼈지.”

김 동문처럼 대학에는 사회에 억눌려 있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1973년 10월 전국대학가는 술렁거렸다. 유신체제아래 1년간 억눌려 있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데모 한번으로 없어질 정부라고 생각하진 않았지. 하지만 유신이라는 숨 막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싸운거야.”

경북대학교를 시작으로 3월 21일부터 전국적인 시위 움직임을 보였지만 강력한 공권력의 대응으로 예상보다 적은 학생이 참여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학생들은 참혹했던 유신체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973년 말부터 꾸준히 투쟁준비를 지속해왔던 것처럼 1974년 4월 3일 투쟁이 결정됐다. 서울에서 민청학련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해 시위 움직임을 저지한다. 그리고 유신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유신철폐를 주장한 학생들의 시도는 인혁당 지령을 받아 일어난 공산폭력혁명으로 국가에 의해 조작되고 만다.
“우리는 전국적으로 선언문을 만들었어. 선언문을 내기 위해서는 조직 명칭이 필요하니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가칭을 단 것 뿐이야. 그런데 국가는 마치 북한의 사주를 받아 국가를 전복하려고 한 것처럼 용공조작을 한거야.”

우리 대학에서도 1974년 4월 9일 유신 반대시위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학교에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잡기 위한 형사들로 가득했다. 유 동문은 당시 수업을 듣던 도중 형사에게 끌려갔다. 그는 “1교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때 경찰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지. 유선규가 누구냐고 물었고 학생들은 차마 대답 못했어. ‘내가 유선규다’라고 말하며 내발로 나갈 수밖에 없었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정신계승 노력 이어져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간 이들은 두 달간 구치소에 구금당했다.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광주·서부경찰서로 각각 나눠져 1974년 4월에 구금됐던 이들은 서울로 올라가 군법 재판을 받은 이후 11월이 되서야 광주교도소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군법에 의해 1심 12년, 2심 10년 형을 확정 받았다. 하지만 1974년도 후반기 반정부, 반유신 데모가 벌어졌고 국제적으로도 교포들이 박정희 정권을 규탄했다. 이런 상황 속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지 10개월만인 1975년 2월 15일 20여명의 관계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석방시켰다.

하지만 석방이 된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게 된 그들은 생계를 위해 광주 시내에 포장마차를 열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데모 자금으로 쓸 것이라며 끊임없이 단속했다.
“다른 생계형 포장마차들까지 단속하더라고. 도저히 못 참겠어서 그만뒀지. 심지어 박정희가 광주 내려올 때면 우리들은 산장으로 잡혀갔어. 박정희 가고 나서야 풀어주고 그랬지.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70년대 후반까지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들은 끊임없이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잠복하며 따라다녔다.
“정말 섬뜩했어. 끊임없이 감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지.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저 멀리서 먼저 살펴봤어. 누가 우리를 잡으러 올까봐.”

석방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자신들의 조건에 맞춰 노동·농민·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힘썼다.
“치열하게 살았지. 보이지는 않지만 6.29 교육지표 사건, 5·18 민주화 운동 등 민청학련의 정신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

2009년 재심을 통해 사법부로부터 무죄·면소판결을 받았지만 이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할 예정이다. 시대와 맞섰던 그들의 청춘을 지금의 학생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그동안 18명의 전남대 민청학련 관련자 중 두 분이 고인이 됐어. 우리는 유신과 치열하게 싸우며 20대를 보냈지. 이제 그 민청학련 정신의 맥락을 이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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