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영향력 커진 과학기술…과학기술사회학에 대한 관심 필요

근대 초기 유럽에는 ‘무기연고’라는 신비한 치료술이 있었다. 파라켈수스라는 한 방랑 의사에 의해 시작된 그 치료술은 총상을 당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 사람의 상처 부위가 아니라 상처를 입힌 총구에 연고를 바르는 기이한 방법이었다. 일명 ‘자기치료’라고 일컬어진 그 치료술은 자력을 지닌 자석이 원격으로 철을 끌어당기듯, 총구에 바른 연고가 상처를 치유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부상자의 상처 부위에 이런 치료법을 시도할 사람이 제정신이라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 무기연고 치료술은 풍수의 ‘동기감응론(같은 기끼리 서로 감하고 응한다)’과도 유사하다. 중국 한나라 때, 궁궐에 구리로 만든 종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그 종이 저절로 울렸다. 황제가 신하에게 그 이유를 묻자, 신하는 서쪽의 구리산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며칠 뒤, 서쪽의 구리산이 무너졌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황제는 깜짝 놀라 그 신하에게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냐고 물었다. 신하는 궁궐의 구리종을 서쪽의 구리산에서 캐낸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서로 감응하여 종이 저절로 울린 것이라고 답했다. 이 고사가 말해주는 풍수의 ‘동기감응론’은 근대 초기 무기연고 치료술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원격작용력’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무기연고’나 ‘동기감응론’의 ‘원격작용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멀리 떨어진 행성들 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이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뉴턴의 만유인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의심 없이 이 만유인력을 과학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만유인력과 그 앞의 무기연고, 동기감응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알고 보면 모두 다 ‘원격작용력’이 아니던가? 앞의 둘은 미신으로 웃어넘기면서도 만유인력에 대해 사람들은 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실제로 뉴턴은 만유인력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많은 비판에 시달렸다. 그 비판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은 데카르트주의자를 비롯한 기계론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두 물체가 아무런 인접 작용이 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믿음에 경악했다. 그리고 그것을 신비한 원격작용력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이 비판에 무너졌다면 뉴턴의 만유인력은 오늘날의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기연고나 동기감응론 같은 신비한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뉴턴은 분명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뉴턴은 원격작용력의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그 힘을 수량화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판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사실 근대과학자들에게 있어서 만유인력은 그 본질적 원인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데 만유인력의 원인을 묻고 있을 과학자는 없다. 그들은 그 힘을 계산함으로써 우주선이 지구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즉, 뉴턴 이후 과학의 목적은 세계가 작동하는 원인(why)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how)를 찾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선회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수량화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근대과학자들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힘, 즉 운동량으로 환원시켰고, 수학의 놀라운 힘을 빌어 그것을 계량화시켰다. 그렇게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과학도구들의 발달을 통한 자연계의 관찰과 실험, 그리고 수량화에 힘입어 근대과학을 탄생시켰다. ‘지식’ 또는 ‘앎’을 의미했던 무색의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가 사이언스(science), 즉 과학이라는 색깔을 띈 것이다. 과학혁명을 거쳐 자신감을 얻은 근대과학은 18세기의 대중화를 거쳐 19세기에는 기술과 결합했다. 일찍이 ‘페이트런’ 즉 후원자가 없이는 과학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가난한 과학자들이 홀로 서기를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19세기는 바야흐로 과학기술의 시대였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과학기술은 그 지나친 승리의 도취감으로 인해 폭력에 물들게 되었다. 과학기술을 지배한 국가가 제국주의가 되었고, 과학기술을 게을리한 국가는 예외없이 식민지로 전락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을 모두가 소리 높여 외쳐댔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군은 인류에게 과연 에덴동산으로 가는 열쇠였는가? 17세기초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새로운 아틀란티스』(1627)에서 꿈꿨던 것처럼, 과학의 발달은 인류에게 지상천국을 가져다주었던 것일까? 그러한 기대는 20세기에 일어난 몇차례의 전쟁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프리츠 하버의 독가스가 살포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는 20세기초 노벨 물리학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던 핵물리학자들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오늘날 지구는 여전히 핵무기의 그늘에서 숨죽이고 있다.

통제 불능의 과학기술은 때때로 참혹한 결과를 불러온다는 경험이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의 발달을 불러왔다. 과학사라는 학문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의 발달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과학사에 과학철학이 가세하면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었다. 거기에 지식사회학의 영향을 받은 과학사회학이 등장했다. 과학은 여타 학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회적 협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타났다.

과학의 합리주의와 상대주의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비교적 거리를 유지해왔던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은 1960년대 들어 먼저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결합하여 과학사·과학철학(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으로 나아갔고, 1970년대 이후에는 과학사회학을 더하여 과학론(또는 과학학, Science Studies)으로 발전했다.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을 개별적으로 논의하는 것보다 포괄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이 증가한 것이다. 거기에 기술이 추가되면서 과학기술사, 과학기술철학, 과학기술사회학으로 진화한 결과, 곧 과학기술사회론(또는 과학기술학,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이 새로운 분야로 대두했다.

과학은 진보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무조건 발달시켜야 한다는, 아울러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과학을 둘러싼 그간의 논의의 결과물이다. 오늘날 일찍이 유래가 없었던 과학기술의 성과들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예를 들어, 유전자조작 식품, 원자력 발전소 건설, 뇌사와 장기이식, 지구온난화 문제 등은 과학적 이슈를 넘어 사회적 이슈가 된지 오래다. 그것들은 결코 과학자들만의 참여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함께 참여할 때야 비로서 바람직하게 풀릴 수 있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그에 발맞춰 대학사회도 변모하고 있다. ‘통섭’, ‘융합’, ‘학제적 연구’ 등 기존의 전공 중심의 학문 패러다임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들어 부쩍 높아지고 있다. 과학기술을 둘러싼 이 같은 연구야말로, 근대학문을 통해 의도치 않게 고착되어버린 영역적 폐쇄성을 뛰어넘는 좋은 시도가 될 것이다. 과학기술학에 대한 관심이 우리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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