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취 전문의로 자리 잡아…개안 무료 수술 봉사 이어와

싸늘한 밤공기가/내려 않는 밤이면 지난 날/회한과 외로움에 몸 뒤척이시며/긴 밤 지새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소리 없이 삼키는 뜨거운 눈물을 보았습니다/늙으신 어머니 손/마디마디는 흘러간 세월만큼/옹이로 남아 야위셨고/깊이 패인 주름과/굽은 허리는 서러움과/고단함이 잔뜩 배여 있으셨지요/(중략)…당신 일신의 고달픈 삶은/한 겨울 서리만큼이나/시리고 아프셨을 겁니다/그래도 이생에/가장 고귀한 사랑은/말로 하는 게 아니라며/그 무딘 손으로 다독이시던/천륜이라는 인연의 고리가 되어 주신 내 어머니/(중략)…언제 다시 당신을/마음 편히 뵈올 날이 있을까요/(중략)…영원히 은혜하겠습니다/사랑합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한결같은 사랑을 그리워하며 일생을 살고 있다. 그가 가장 감동 깊게 읽은 서금년의 ‘천상에 내 그리움아’라는 시를 보면 그 그리움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지냈다. 우연한 계기로 미국에서 둥지를 튼 우리 대학 서영석 동문을 만났다. 서 동문은 미국사회 한인들을 위해 일하고, 세계 고통 받는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를 여의고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진북면에서 태어났다. 서 동문의 아버지, 어머니는 성실한 농부였다. 부지런한 부모님 밑에서 그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몸으로 익혔다. 그가 살던 동네는 80가구가 사는 작은 동네였다. 그 곳은 대부분 서 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그는 동네에서 하루에 버스를 2번 이상 타고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를 중퇴한 서 동문의 어머니는 그가 선생님이나 의사가 되기를 소망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우리 대학 의과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가 입학했던 해 1961년. 5월 22일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만삭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출산하던 날, 동네 의사가 자궁수축제 ‘피토신’을 잘못 투입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신 것이다. 유달리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를 여읜 그는 대학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의료사고를 저지른 의사를 그의 아버지는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며 선처를 베풀었다.

선한 아버지의 마음을 서 동문도 이어 실현하고자 대학생선교읽기선교회(UBF)와 ‘무의촌 진료 활동회’에 들어갔다. 의료 봉사와 선교회 활동을 병행하면서 그는 미국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UBF에서 배우는 영어가 재미있었고 발달된 미국의 의료 기술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그는 미국의사국가고시를 준비했다.

미국 마취과 의사로 자리 잡다 
3년간의 군의관 시절을 거치고 1971년, 서 동문은 전주 보건소에서 1년간 근무했다. 이후 그는 미국 갈 채비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1972년 서 동문은 뉴욕에 있는 병원에서 6개월 훈련을 받았다. 그는 미국 의학 훈련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당시 월남전의 영향으로 미국에 의사가 부족한 상황이라 서 동문은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뉴욕 브로클린 주이시 병원에서 3년 반 근무하다 미시간에 있는 Wyandotte General 병원에서 1년 반, 이후 LA로 병원을 옮긴 뒤 현재까지 LA에서 의사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008년부터는 안과병원에서 안과마취만 전문적으로 했다. 서 동문은 현재 Vincent Eye Surgery Center 마취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개안 수술 의료 선교팀’에서 봉사활동도 열심이다. 캄보디아, 몽골, 멕시코, LA 한인들을 위한 무료 수술을 진행하는 일인데, 1년에 1,000명 가까운 사람을 수술한다. 그는 지금껏 만 명의 백내장 수술을 진행해 왔다. 서 동문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내 위치에서 성실히 할 수 있음에 보람과 감사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적극적인 한인회 활동 펼쳐
5분 수술이든 10시간 수술이든, 마취를 주고 마취를 깨우는 일은 똑같은 집중을 요하는 일이다. 42년간 미국의 마취과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여러 번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응급으로 진행됐던 제왕절개 수술에서 아이와 엄마의 생명을 지켜낸 일, 몸에 칼을 맞고 온 환자, 어린아이가 마취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 뻔한 순간. 이러한 순간순간의 위기와 고비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회봉사활동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한인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 친구를 도와 서 동문도 LA 한인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서 동문은 1994년 LA 한인회 이사장, 1998년 LA 한인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98년 재외동포특례법 미주 추진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재외동포특례법을 통과시켜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해외동포들에게 책보내기 운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작년에는 시에 3,000권의 책을 전달했다.

20년간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다 서 동문은 작년 11월 LA 라크레센타 밸리타운 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정치력이 없으면 소수민족이 살아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많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포기 말라, 또한 절대 포기하지 말라”
서 동문에게 위기가 아닌 순간은 없었다. 매 순간이 위기였지만 그러한 상황들에 직면했을 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서 동문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큰 꿈을 향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서 동문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위하는 일이 가장 스스로의 마음에 와 닿는다”고 말했다. 그는 “남을 위해 일할 때 행복함을 느낀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도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나 지식을 남을 위해 쓰고 싶다”고 전했다.

서 동문은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 묘 가까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의 풍경을 다시 보고 싶다”며 언젠가 “어머니가 있는 그 동네로 돌아가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서영석 동문 ▲1971~72년 전주 보건소 의사 ▲1972~75년 Brooklyn Jewish Hospital Medical Center ▲1976~77년 Wyandotte general Hospital ▲1994~96년 제 22대 L.A. 한인회 이사장 ▲1998~99년 재외동포 특례법 미주 추진위원장 ▲1998~2000년 제 24대 L.A. 한인회장 ▲1999~2001년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수석 부회장 ▲2000~02년 미주한인회총연 서남부 연합회 회장 ▲2001~03년 미주 한인회총연 이민 100주년 사업회장 ▲2004~07년 미주총연 한민족 역사 바로알기 추진 위원장 ▲2007~09년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이사장 ▲2012년 남가주 교회 협의회 이사장 ▲현재 St. Vincent Eye Surgery Center 마취과 과장, 한인동포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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