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로 등단…40년 넘는 세월 하루 86,400초를 온전히 시에 바쳤다

은행나무 아래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 시를 쓰고 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는 그의 말은 그만의 시 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사평역에서’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지금은 그것이 감옥이 돼버렸다는 그는 우리 대학 곽재구 동문(국어국문학·75)이다. “지금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시가 대표작”이라는 시인, 전남대에서 황금기를 보냈다는 그를 순천대 정문 앞 ‘후두둑’이라는 카페에서 만났다. 

‘도시락’같은 글을 쓰고 싶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었다. 곽 동문은 소설가가 되겠다고 답했다. 당시 곽 동문이 생각하는 소설가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슬프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었다. 어린나이에 소설가가 슬프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곽 동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 있는 발언이었다. 집 없이 떠돌아다니던 가난한 어린 시절에 곽 동문은 ‘소설가’를 꿈꿨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아주 좋아해 주셨다. 그 이후 선생님은 당신 자전거 뒤에 나를 자주 태워주셨다. 당시 자전거 뒷좌석에는 선생님의 도시락이 있었다. 그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면 엉덩이가 따뜻해지면서 ‘밥’ 느낌이 몸으로 전해져 왔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 내용은, 그 의미는 당시 선생님의 도시락과 같다. 사람들의 살 속으로 따뜻하게 스며드는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곽 동문은 자라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은행잎이 날리는 가을, 곽 동문은 광주일고 은행나무 아래서 박몽구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곽 동문에게 함께 시를 쓰자고 요청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종이하나를 꺼내 곽 동문에게 건넸다. 백노지에는 개미가 기어가는 글씨들로 시가 쓰여 있었다.

“가을에 관한 시였다. 아직도 생각나는 문구가 있다. ‘그녀는 데친 사과 빛의 얼굴을 하고 가을 속으로 떠나갔다. 새들의 솜털이 겨드랑이에 부풀고 있다.’”
곽 동문은 그 시를 읽고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친구는 식음을 전폐하고 시만 쓰는 친구였다. 곽 동문은 박몽구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시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오로지 내 인생은 ‘시’
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시집 한 권과 평론집을 읽었다. 친구들과 ‘용광’이라는 동인지를 만들기도 했다. 용광은 일주일에 두 번 기성 시에 관해 토론하고, 일주일에 한 번 직접 창작한 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당시에는 우리 시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동인지 용광에서 보낸 시 창작의 시간은 나의 ‘시 인생’에 중요한 걸음이 됐다.”

용광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곽 동문은 대학에 가기 위해 전남지역 예비고사를 봤다. 그는 우리 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해 곽 동문이 한 일은 ‘용봉문학’이라는 동인지를 만든 것이었다. 당시 용봉문학에서 함께 시를 썼던 선배, 후배들의 시는 중앙지 신춘문예에 줄줄이 당선되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대학 시절 내내 시 외에는 별다른 것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곽 동문의 특기는 ‘수업 안 들어가기’와 ‘사색하기’, ‘시 쓰기’였다. 인문대 등나무 아래 벤치 맨 끝 자리는 그가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기는 ‘고정 자리’였다.

“생각해보면 전남대는 용과 봉이 춤추는 자리인 것 같다. 나는 그 용과 봉의 기운을 많이 받았다. 한국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큰 뜻을 펼치기 아주 좋은 곳이다. 세상과 삶에 대한 의견도 조금씩 갖춰나가게 된 것도 전남대에서 보낸 시간들 덕분이다.”

‘사평역에서’로 신춘문예 당선
1979년 6월, 곽 동문은 제대를 했다. 그리고 12월에 있는 신춘문예를 준비했다. 열심히 썼다. 갖고 있는 열정 전부를 쏟았다. 갖고 있는 능력 전부를 썼다. 하지만 그 해 예선에서 떨어졌다. 절망스런 결과에 처음으로 시를 ‘포기’했다.

1980년 5월이 왔다. 곽 동문은 항쟁 속에서 살았다. 공수부대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아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살았다. 엄혹한 시간 속에서 그는 ‘진실’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5월이 끝나고, 곽 동문은 친구들의 자취방을 돌아다니며 생활을 이어갔다. 그 해 12월 신세진 친구가 곽 동문에게 물었다. “신춘문예 지원했는가?” 그 말에 곽 동문은 작년에 썼던 시들을 다시 쉽게 풀어 써서 <한국일보>에 5편을 보냈다. 시 4편이 남았다. 남은 시 4편과 21살, 대학교 2학년 때 썼던 ‘사평역에서’를 추가해 5편을 <중앙일보>에 보냈다. 1981년 곽 동문의 ‘사평역에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사평역에서’는 신춘문예를 생각하며 쓴 시가 아니다. 스무 살이 되어 시 쓰는 일이 내 생의 업이 되리라고 무의식 속으로 받아 들였을 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단어는 ‘시간’과 ‘길’이었다. 나는 내 곁의 시간들을 사랑했다. 형색으로 치자면 그 시간들은 한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70년 대 중반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의 행렬들이 이제 막 문학에 눈 뜬 내 가슴에 다가왔다. 나는 그들을 끌어안기로 작정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철저히 못생기고 억압 받은 그 시간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내 스스로가 발붙일 땅이 없었다.”

‘사평역에서’의 모델이 된 역은 ‘남광주역’이다. 남광주역은 곽 동문이 ‘사평역에서’를 쓰던 1970년대 중반 비둘기호가 정차하는 광주 외곽의 조그만 간이역이었다. 이용객들은 주로 보성 벌교 방면의 시골 장꾼들이었다.

“하루하루의 벌이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 날이 추워지면서 꽁꽁 언 손바닥을 난로의 불빛 속에 던져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무렵 보편적인 한국인의 삶의 풍경이었다.”

고통 받는 자들의 희망을 위해
1982년 곽 동문은 전남대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 그는 고통 받고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한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희망의 길로 나아가게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시만 보고 걸었다.

“행운이다. 다른 생각 안하고 40년 이상 오로지 시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일이 내 직업이 돼서 행복하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라는 ‘사평역에서’의 첫 행은 좀처럼 오지 않는 희망을 뜻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의미는 ‘희망이 언젠간 꼭 오긴 온다’는 것이다.

곽 동문이 그의 시세계를 정립하는 데 또 다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중국여행이었다. 그는 1989년, 2달간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속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한 것은 인간 개개인의 ‘순수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의 진보는 이데올로기나 철학자, 사상가, 뛰어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꿈들이 모여 진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희망의 이야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졌다. 따뜻함은 그만의 시를 만들게 했다. 결국 그는 바랐던 데로 선생님의 따뜻한 도시락과 같은 시를 쓰고 있다.  

곽재구 동문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사평역에서’ 당선 ▲1983년 시집 <사평역에서> 간행 ▲1993년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간행 ▲2001년~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2002년 산문집 <포구기행> 간행 ▲2011년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1초들> 간행 ▲2012년 시집 <와온바다>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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