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 행동 수반되지 않는 '페이스북 좋아요 100번' 정치참여 아냐

인간이 이용하는 미디어 중에서 ‘소셜’하지 않은 미디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지만 지난해부터 트위터, 페이스북 등 이른바 ‘소셜 미디어’가 사람들 사이에 부쩍 회자되고 있다. 스마트폰의 대중적 확산에 따라 친숙해진 이들 소셜 미디어는 오프라인 인맥을 회복하거나 유지시켜주고, 때로는 새로운 관계를 확장하게 도와주는 ‘관계중심 미디어’를 가리킨다.

이렇게 보자면 소셜 미디어에는 최근 자주 거론되는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SNS(Social Network Service) 말고도 멀리는 아이러브스쿨부터 근래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여러 서비스들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엄밀한 용어 정의가 무엇이든 대중에게 소셜 미디어는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세상 정보를 얻고 ‘인맥을 관리하게 도와주는’ SNS와 동의어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가 단지 ‘인맥을 관리’하는 미디어에 불과했다면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관심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비록 스마트폰이라는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소셜 미디어에는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뜨겁게 사람이 모이고, 정보가 흐르고, 마케팅이 성사되고, 사회적 의제가 전파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 사회 참여와 관련해서 소셜 미디어는 그 어떤 미디어보다 ‘소셜’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 점에서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해 대중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정치 소비자에 머물지 않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첫째, 소셜 미디어는 놀이나 재미 요소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문화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의 결합으로 설명되는 이런 현상은 지난해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 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투표 인증샷 놀이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 몇몇 유명인들이 투표를 독려하면서 ‘나는 투표율이 ~%를 넘으면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이를 리트윗(RT)라는 확산 시스템을 통해 빠르게 전파시키는 것, 또 그로 인해 실제로 투표에 임하는 것 등도 놀이하듯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즉 이제 대중은 근엄하고 엄숙한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선거과정을 재미와 오락적 요소로 이해하고, 역으로 이들 요소를 배제한 사회적 참여를 상상하지 않는다.

둘째, 소셜 미디어는 일상의 영역과 공적 의제 영역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환언하면, 2000년대 인터넷 등장 이후 연구자들을 사로잡았던 사적/공적 영역이라는 관계 설정을 둘러싼 고민이 소셜 미디어를 매개로 다시 집중된 것이다. 대중은 더 이상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사적인 영역에 남겨두지 않는다. 식탁 위의 먹거리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인식하고 시위에 나섰던 쇠고기 촛불집회에서 이러한 대중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성의 영역, 즉 함께 한다는 동반의식, 분노, 슬픔과 같은 감성을 교류하는 것이 정치 참여의 원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교류의 중심에 소셜 미디어가 있다. 한마디로 소셜 미디어는 참여의 범위와 형식 면에서 전례없는 다양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한 정치 참여에는 함정이 존재한다. 우선은 기술적,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실제로 모두가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 일부 사례가 너무 낭만적으로 확대 해석된 것일 수 있다는 우려이다.

또 소셜 미디어를 통한 정치 참여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함정 중의 하나는 소셜 미디어가 마치 참여하는 듯한 착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100만번 라이크(좋아요) 버튼을 누른다고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글래드웰(Gladwell)의 주장처럼 본질적인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행위가 마치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착각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선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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