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혁 열사(의예·84)는 입학 후 이념써클 ‘탈’에 가입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85년 비교육적 유급제 반대투쟁 중 행방불명 됐고 열흘 뒤 무등산에서 동사체로 발견됐다. ▲ 김광석 열사(당시 행정학과 3학년)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하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순직했다. ▲ 김남주 열사(영문학·68)는 3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반유신투쟁 등을 전개하다 투옥, 제적 당했다. 옥중 <진혼가>와 <잿더미> 등의 반유신투쟁에 대한 저항시를 발표했다. 이후 인혁당 사건, 남민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수감되었으나 문민정부 출범 후 가석방 됐다. 94년 췌장암으로 운명했고 장례식은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 문승필 열사(화학공학·90)는 동아리 YMCA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중 실종되었고 실종 한달만에 철로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 박관현 열사(행정학·78)는 80년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시민들과 학생들의 주도해 반독재투쟁을 벌이다 체포됐다. 82년 10월, 옥중 단식투쟁 끝에 세상을 떠났다. ▲ 박승희 열사(식품영양학·90)는 용봉 교지 편집위원회로 활동을 하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2만학우 단결투쟁! 미국반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였고 21일간 병상투쟁 하다 세상을 떠났다. ▲ 박인순 열사는 재학시 계림교회 대학부회장으로서 민중가요집 <메아리1집>을 발행했다. ‘계명인의 밤’에서 정권비판 풍자극을 하며 ‘반외세 반독재 투쟁을 통하여 민중해방과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88년 한신대 신학대학원 재학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 서호빈 열사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해 5월 27일 도청에서 최후까지 항쟁하다 계엄군에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 신영일 열사(국사교육·77)는 들불야학을 창설하고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을 전개 했다. 광주 교도소 수감 중 40일간 단식투쟁을 하다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이후 전남지역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체로써 활동하다가 86년 5월 작고했다. ▲ 유영선 열사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해 5월 27일 도청에서 최후까지 항쟁하다 계엄군에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 윤상원(본명 윤개원) 열사(정치외교학·71)는 들불야학에 참여, 전국민주노동자 연맹을 창설하는 등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같은 달 27일 도청에서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 이용석 열사(금속학·91)는 2002년 근로복지공단 계약직 직원으로 채용되어 노조결성,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본부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 전국비정규노동장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다. 이외에도 우리 대학에는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박기순, 장경희 열사들이 있다. 전대신문 news@cnumedia.com 관련기사 민주화 이룩하기 위한 60년간의 투쟁 60년 책갈피에 묻어난 아날로그적 풍경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회원로그인 작성자 비밀번호 댓글 내용입력 댓글 정렬 최신순 추천순 답글순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닫기 더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닫기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본문 / 400 비밀번호 닫기 내 댓글 모음 닫기
▲ 기혁 열사(의예·84)는 입학 후 이념써클 ‘탈’에 가입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85년 비교육적 유급제 반대투쟁 중 행방불명 됐고 열흘 뒤 무등산에서 동사체로 발견됐다. ▲ 김광석 열사(당시 행정학과 3학년)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하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순직했다. ▲ 김남주 열사(영문학·68)는 3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반유신투쟁 등을 전개하다 투옥, 제적 당했다. 옥중 <진혼가>와 <잿더미> 등의 반유신투쟁에 대한 저항시를 발표했다. 이후 인혁당 사건, 남민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수감되었으나 문민정부 출범 후 가석방 됐다. 94년 췌장암으로 운명했고 장례식은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 문승필 열사(화학공학·90)는 동아리 YMCA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중 실종되었고 실종 한달만에 철로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 박관현 열사(행정학·78)는 80년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시민들과 학생들의 주도해 반독재투쟁을 벌이다 체포됐다. 82년 10월, 옥중 단식투쟁 끝에 세상을 떠났다. ▲ 박승희 열사(식품영양학·90)는 용봉 교지 편집위원회로 활동을 하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2만학우 단결투쟁! 미국반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였고 21일간 병상투쟁 하다 세상을 떠났다. ▲ 박인순 열사는 재학시 계림교회 대학부회장으로서 민중가요집 <메아리1집>을 발행했다. ‘계명인의 밤’에서 정권비판 풍자극을 하며 ‘반외세 반독재 투쟁을 통하여 민중해방과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88년 한신대 신학대학원 재학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 서호빈 열사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해 5월 27일 도청에서 최후까지 항쟁하다 계엄군에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 신영일 열사(국사교육·77)는 들불야학을 창설하고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을 전개 했다. 광주 교도소 수감 중 40일간 단식투쟁을 하다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이후 전남지역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체로써 활동하다가 86년 5월 작고했다. ▲ 유영선 열사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해 5월 27일 도청에서 최후까지 항쟁하다 계엄군에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 윤상원(본명 윤개원) 열사(정치외교학·71)는 들불야학에 참여, 전국민주노동자 연맹을 창설하는 등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같은 달 27일 도청에서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 이용석 열사(금속학·91)는 2002년 근로복지공단 계약직 직원으로 채용되어 노조결성,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광주본부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 전국비정규노동장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다. 이외에도 우리 대학에는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박기순, 장경희 열사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