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신문은 1954년 창간 이래 변화하는 우리 대학의 모습을 담아 왔다. 창간 57주년을 맞아 전대신문에 담긴 우리 대학의 모습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개교 초기 학교의 틀을 다지던 때부터 격동의 시기를 거쳐 오늘날 모습까지…. 이를 통해 앞으로 전대신문에 담길 우리 대학을 상상해본다. /엮은이

창간호 1954년 6월 1일자

1면에 실린 개교 2주년 입학식 전경. 1950년대의 전대신문에는 주로 우리 대학의 태동과 발전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213호 1965년 4월 2일자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집중 보도하고 있다.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정권은 1951년부터 지속적으로 한일회담을 열며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학생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에서 시위가 들끓었다. 특히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앞두고 시위가 절정에 이름에 따라 시위 탄압도 극심했다.

429호 1971년 10월 14일자

유신헌법 개헌을 앞두고 극렬해진 대학가 탄압과 학생들의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 1971년은 교련 철폐와 7대 대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대학가를 휩쓰는 가운데, 본교에서 벌어진 3일간의 대규모 데모로 공권력과 큰 마찰이 있었다. 더해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됐다. 신문이 나온 이틀 뒤인 16일엔 초유의 위헌적 행태인 위수령이 발동돼 학교에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 당시 위수령이 발동한 대학은 서울을 제외하면 전남대가 유일했다.

713호 1980년 5월 15일자

광주의 봄을 보여주고 있다. 학생과 교수 그리고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에 모여 계엄령 해제와 노동 3권 보장 등 시국을 성토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들의 뜨거운 시대정신의 대가는 ‘피’의 순교로 이어졌다. 며칠 뒤 한국 1980년대를 규정하는 5·18민중항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전대신문은 이후 4개월 동안 발행되지 못했다.

1025호 1991년 4월 30일자

박승희 열사의 분신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희 열사는 전날인 29일 ‘강경대학형 살인만행 규탄 및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2만학우 결의대회’ 집회 도중 학생들의 각성을 끌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불살랐다. 학생운동이 주춤했던 1990년대의 배경 속에서 1991년 박승희 열사를 위시한 분신 정국은 학생 운동의 절정을 이룸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상처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1361호 2006년 3월 2일자

통합 전남대 출범을 알리고 있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광주캠퍼스, 여수캠퍼스, 학동캠퍼스로 구성된 3캠퍼스 체제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통합 계획 미흡으로 유사중복학과 문제 등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몸살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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