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청춘이 불탄 ‘분신정국’
1987년 6월, 민주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분열로 인해 이듬해 노태우 정권이 탄생한다. 공안정국과 노동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도 높은 탄압으로 1990년 11월까지 구속된 양심수가 1,259명에 달했다. 노사분규 현장과 대학에 수시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방송관계법, 국가보안법, 경찰법 등이 날치기 통과되고, 페놀 사태, 수서비리 등으로 국민의 실망감과 분노가 점차 높아갔다.

4월 26일 시위 도중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망하였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 박창수 의문사, 8일 전민련 김기설 분신, 10일 노동자 윤용하 분신, 18일 시민 이정순 분신, 22일 노동자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경찰에 밟혀 압사, 6월 1일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 정국' 이 조성되었다.

국민대회는 5월 4일 전국 23개 지역에서 16만 명, 9일 87개 지역에서 30만 명, 14일 15개 지역에서 30만 명, 18일 81개 지역에서 40만 명이 모이는 등 대규모 시위가 6월 항쟁 기간을 방불케 하였다.

▲ 박승희 죽음. 분신 정국의 출발점
“언니, 명지대 남학생이 백골단에 맞아 죽었대. 최루탄에 맞아 눈이 실명되어도 학우들은 겨우 몇백 명 모이고 정말 친구를 사랑하는 분노가 너무 작아. 세상이 참 무서워. 신문에 나온 것처럼 불감증의 시대야. 명지대 학생도 마찬가지겠지!” (병상투쟁일지 중에서)

91년 초 국민 대다수가 국가폭력에 침묵하는 상황에서 강경대의 죽음은 뇌관을 터트리는 것과 같았고, 전남대생 박승희의 분신은 민주화 운동의 한 분수령을 이룬 5월 투쟁을 더욱 타오르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4월 29일 강경대의 시신이 안치된 연세대. 5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국민대회에서 박승희의 분신 소식은 연세대 운동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박승희의 분신은 자기희생을 통해 대중의 도덕적 분노를 일으키고, 열기를 촉발시켜 끌어낸 힘으로 사회적 침묵을 무너뜨리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이른바 ‘분신 정국’의 출발이었다.

▲ 2011년 우리는…
자연은 나이테와 화석, 지층의 사이사이에 지구의 역사를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1991년 4-5월이 그렇다. 스무 살 여대생의 처절하게 고독한 결단과 무서운 실천이 그렇다. 아예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잊혀진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있었던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으로 만들려 한다.

전남대 구 본관 ‘5.18기념관’에는 박승희의 뜨거운 삶이 전시되어 있다.

현 정부 들어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후퇴, 멀어지는 통일과 냉전 구도의 강화, 표현의 자유 위축, 청년 실업의 증가, 사회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증가 등 대학생·노동자 등 많은 국민이 고통스럽게 지내는 것은 20년 전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 보이지 않는 풍경. 외면하는 현실에서 역사의 발전이 가능한가? 역사가 외면한 너무 많은 조각의 ‘사건’들이 이름 없는 공간으로 사라져 버렸다.

박승희는 자신을 불태우며 미국 반대(자주), 노태우 처단(민주), 전남대 20,000 학우 단결!을 외쳤다. 이 시대 우리의 삶에도 자기가 주인 되는 삶, 통일 조국, 민주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단결된 노력이 더욱 소중할 때이다. 함께 노력하여 이룩할 때 공동체는 더욱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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