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기구를 선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나에게 더 큰 조각의 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만약 개인의 편의와 이익만이 문제라면, 차라리 대표 기구를 구성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각종 규제를 부정하고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이들의 속내가 그러할 것이다. 이건희처럼 불법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이들과 여기에 기생하는 이들에게 여러 규제와 대표 기구는 자신의 파이를 갉아먹는 쥐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대학 내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학내 구성원이 선거나 학생회의 각종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조각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굳이 대표 기구를 두고 관심을 쏟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갈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방패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희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창과 방패가 있기 때문에 다른 방패가 필요하지 않다. 이와 반대로 학교의 경우에는 총학생회가 학내 구성원 모두를 감싸 줄 정도로 크고 단단한 방패처럼 보이지 않으며 개인의 적당한 처신이 더 탁월한 방패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싸워야 할 일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발생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이건희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싸움꾼을 바란다. 그리고 마르크스 책을 읽는 학생을 탄압하고 힘없는 노동자를 길거리로, 죽음으로 내모는 세력과 싸울 싸움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싸움꾼의 모습을 보고서 싸움에 동참하거나 무관심하게 된다. 만약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과 싸우지 않고 굴종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냉정하게 다른 싸움꾼을 찾거나 서로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결국은 이익의 문제로 환원된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고서 받아오는 불량식품과 다르다. 여기에는 타인의 고통과 부조리에 대한 관심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에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정의의 문제를 다루기 마련이다.

전남대 역시 싸워야 할 문제가 많다. 국립대 법인화 문제, 명예학위 장사, 비정규 교수 문제 등의 문제를 보면 지금 우리의 싸움꾼이 누구와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설 연휴가 끝나고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대학본부 앞에서 출근하는 교직원들에게 초코파이와 쪽지로 새해인사와 등록금 동결에 대한 감사인사를 했다. 심지어 정몽준 사태 때에는 수여식 진행을 위해서 시위대를 자신들이 설치하는 경계 안으로 묶어 두고 이를 벗어날 경우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다는 계획도 했다고 한다.(중운위 회의록 참조) 과연 ‘전설’은 우리의 싸움꾼일까?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