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필봉으로 군부독재에 맞서… 우리 대학서 후광학술상 수상

참 언론인,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불린 ‘시대의 스승’ 리영희 선생이 지난 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수 년전 중풍으로 쓰러진 후 우측 하반신 마비로 한동안 집필활동을 중단했던 선생은 금년 봄 다시 간경화 증상이 나타나 힘겨운 투병생활을 해오다 이날 오전 0시 30분께 서울 중랑구 면목동 소재 녹색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공무원인 이근국씨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해양대학교 졸업 후 경북 안동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장교로 입대했다. 입대 7년만인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선생은 우연히 합동통신사의 신입사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 합격하여 그해부터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인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은 언론인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회유와 탄압공작이 자행하였는데, 그 결과 기자사회는 지사적 언론인과 권력이나 이권을 좇는 사이비 언론인으로 양분되었다. 선생은 당연히 전자에 섰는데, 이는 당시 몸담고 있던 합동통신사의 분위기도 배경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선생은 결혼하여 부모를 모시고 변두리 월세방에서 어렵게 생활했는데, 쥐꼬리만한 신문사 월급으로는 부족해 영어번역 등 부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의 불법선거가 자행되자 참다못한 선생은 현직기자 신분으로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4월 19일 학생시위대가 광화문에서 경무대(현 청와대)로 돌진할 때 선생은 취재목적이 아니라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또 당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4.19 시위상황을 현장에서 취재하자 선생은 이를 마치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국내언론이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던 상황에서 외신 보도는 한국정부에 큰 부담이 되었고, 자유당 정권 붕괴에 선생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정권이 수립되었으나 그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5월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정치권은 물론 언론계조차도 다들 숨죽이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 선생은 편집국 기자들 앞에서 쿠데타의 부당성을 밝히며 군대의 정권탈취에 반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당시 군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이는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소 선생은 옳다고 믿는 일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와의 인연은 쿠데타 그해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 동행취재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동아, 조선 기자들은 정부의 공식발표 자료를 참고로 친정부적인 기사를 쓴 반면, 선생은 평소 친분을 쌓아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조속한 민정이양, 군의 원대복귀, 한일국교정상화 조속 재개 등 박 정권에 부담스런 요구를 했다는 사실을 입수하여 이를 보도하였다. 이 내용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낳았다, 선생은 취재도중 ‘본사 귀환’ 명령을 받았고, 이 일로 박 정권에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한편 64년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그해 11월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문제를 보도해 큰 파장을 던졌다. 이 기사로 선생은 반공법 위반혐의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생애 첫 감옥살이였다. 그 얼마 뒤 선생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응당한 보답을 할 테니 베트남 전쟁(파병 등)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몇 번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보답’이란 월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과 껄끄러운 박 정권과의 화해, 그리고 반공법 기소 취하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결국 “거짓은 쓰지 못하겠다.”며 부탁을 거절하였고, 이 일로 조선일보도 그만둬야만 했다.
조선일보를 그만 두면서 졸지에 백수가 된 선생은 살아갈 날이 캄캄했다. 재산이라곤 제기동 미나리밭 가운데 마련한 13평짜리 집 하나가 전부였다. 궁리 끝에 선생은 펜과 지식 대신 육체노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양계장 사업은 뒷돈이 부족해 포기하였고, 택시운전은 노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소설가 이병주를 만나 그가 운영하던 출판사의 서적 외판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판매고의 몇 할을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선생은 매일 새끼줄로 책 20권을 묶어 들고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선생은 식구들의 생계를 한동안 꾸려가기도 했다.
이 무렵 선생은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며 다양한 주제의 평론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평론활동을 인정받아 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유신정권 하에서 선생은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문제를 깊이 고민한 끝에 전공분야 공부보다도 대중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데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는 향후 동양의 국제정세에 큰 변수가 될 중국연구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마침 한양대에서 중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자 책임자를 맡아 범공산권 문제를 포함해 한반도 주변국가들의 문제를 천착해나갔다. 그러나 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박 정권이 ‘교수임용제도’라는 걸 만들어 이른바 ‘찍힌’ 교수들을 솎아냈는데, 교수임용 4년만에 선생은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역설이지만, 글쟁이에게 실업은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74년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낸데 이어 77년 후속편으로 <우상과 이성>을 한길사에서 펴냈다. 이 두 권의 책으로 선생은 뜻있는 청년들에게는 ‘사상의 은사’로, 유신정권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이란 양극단의 평가를 받았다. 이 책들은 곧바로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고, 선생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다시 영어의 신세가 되었다. 그해 12월 27일, 검찰 취조가 끝나고 기소가 확정되었는데 이날 모친의 부음소식을 듣고는 감옥에서 나온 저녁식사로 어머님 제사를 지내야 했다.
10.26사태로 박 정권이 막을 내린 후에도 선생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제물’이 필요했고, 선생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다시 구속되었다. 신군부가 선생을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해 투옥시켰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선생을 두고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그해 7월 선생은 석방되었으나 대학에서 다시 해직되었다. 실직에 따른 경제적 고통은 가중되었지만 선생의 지적 활동은 다시 황금기를 맞아 이 기간에 <중국백서> 등 3권의 책을 펴냈다. 84년 7월 대학으로 돌아온 선생은 이후 집필활동에 전념하면서 취재차 미국 방문 후 23년만에 처음으로 일본, 독일 등지를 다녀왔다. 이듬해 85년에는 미국 버클리대학교 아시아학과 부교수로 임용돼 한국 현대정치운동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은 선생에게 또 하나의 전환기였다. 88년 5월 15일 <한겨레> 창간이 그것인데, 선생은 논설고문과 이사직을 맡아 대안언론 창달에 혼신을 쏟았다. 이듬해 <한겨레> 창간1주년 기념 방북 기획취재를 준비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다시 옥고를 치렀는데, 선생은 그야말로 국가보안법의 ‘단골손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해직, 다섯 차례의 구속 등 선생의 80평생은 고통과 역경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말년은 외롭지 않았다. 95년 한양대를 정년퇴직하면서 단재상을 수상한 이후 뒤늦게 상복이 터졌다. 99년 늦봄통일상, 2000년 만해상, 2007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08년 김대중 학술상을 각각 수상했다. 96년 결혼 40주년을 맞아 인세로 부부동반으로 지중해 여행을 다녀왔으며, 2005년엔 투병 와중에 자서전 <대화>를 대담형식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노년의 육신은 이미 병마 앞에 이미 약해져 있었다. 뇌출혈로 한번 쓰러진 몸이 간경화까지 겹치면서 마지막까지 힘든 투병생활을 했으나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선생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8일 오전 빈소가 차려진 세브란스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선생의 유해는 생전에 근무했던 한겨레신문사를 들러 수원에서 화장한 후 이날 오후 5시 광주 5.18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선생은 5.18유공자로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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