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분청자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균형 잡힌 조형과 포근하게 느껴지는 안정감이 비색의 청자색과 어울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런 아름다움을 지녔건만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술의 단절로 인해 그 비밀을 밝히지 못했던 청자. 허나 고현(古現) 조기정 장인의 꾸준한 노력으로 전통 청자의 재현이 가능해졌다. 질 좋은 고령토와 유약 원료가 풍부한 전라남도에서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 맥을 이어왔던 조기정. 그는 떠났지만 그가 만들었던 도자기에는 살아 숨 쉬는 신념이 깃들어 있다.

열혈청년, 도예에 입문하다
조기정은 1937년 6월 광주 월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선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세는 기울었다. 가난의 고통보다 자립의식을 키워갔다.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온 조기정은 “강해져야 한다. 모든 면에서 실력도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살았다. 그는 초등생 시절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오죽하면 담임 교사가 그에게 ‘왜 조기정, 어째서 조기정’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조기정은 광주 서중‧일고를 거쳐 57년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시절에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며 학생회를 이끌었고 4개의 태권도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남자로서의 의리와 육체‧정신적 건강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 당시 대학 사회에서는 ‘자원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있었다. 국가의 미래를 짊어지기 위한 큰 뜻을 품은 젊은 대학생들이 대거 참여했고 조기정도 동참해 전남 대표로 활동하게 된다. 이에 광주와 전남지역의 자원을 조사하면서 이 지역에 수많은 가마터와 도자기 파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였다. 그는 도자기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영글었다.

도전과 일념
그는 청자를 만드는 도공에게 그 성과를 전해 줄 요량으로 전국 도요지 발굴 작업에 앞장서서 참여하는 등 청자 연구에 온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끝내 제대로 된 전공자를 찾을 수 없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직접 도공의 길로 뛰어들게 한 계기가 됐다. 왜 그는 스승도 선배도 없는 불모지에서 600년 동안 전통이 끊긴 고려청자 재현에 일생을 불태웠을까?
조기정은 도자기를 살피는 연구과정 중 한, 중, 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단서를 발견했다. 중국은 일찍이 황제가 직접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고서 발전시켰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도자기 문화도 중국과 더불어 발전한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도공을 대거 본국으로 이끌고 감으로써 중국, 한국의 도자기 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그는 오늘날 일본의 경제성장이 도자기 문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세계적으로 도자기하면 중국과 일본이 대표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조기정은 고려청자 신비의 비색 재련을 위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단절된 우리 조상의 우수성을 잇고 한국도예의 중요한 힘이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청자에 일생을 바치다
그는 성형에 주안을 두고 도예에 입문한 도예가들과 달리 초기부터 원료에 관심을 가지고 도자에 접근했다. 얼마 안 되는 청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국내를 비롯해 일본의 도요지를 발굴하며 파편과 원료수집에 정열을 쏟아 부었다. 1960년대 초 그는 함평초등학교 과학반 조교로 일하였는데 1964년 함평초등학교 과학반이 출품한 ‘고려청자’로 전국과학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65년 송도요업사의 기술상무로 근무하면서 보다 청자를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1967년 대지 2천여 평에 무등도요를 설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는 수백 번 가마를 지었다 헐었다 하면서 마침내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유약개발에 전력하여 100여 가지의 유약개발에 성공했으며 1978년 2월에 현대과학으로도 재현이 어렵다는 ‘순청자유약’을 이용하여 17년의 집념 끝에 고려청자의 재현에 성공했다. 600여년 동안 단절되어 온 가마에 다시 불을 지폈다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우리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현대 민예자기를 개발하고 세계화하는데 힘썼다. 청자비색의 재현을 넘어 그만의 독특한 민예자기의 개발은 과거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닌, 오랜 전통의 숨결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감각과 해석을 통해 새로움을 열어간다는 호(古現)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기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유약’이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초목회를 사용하는 잿물이 청자의 비법을 푸는 열쇠라는 기존의 주장에 과감히 반론을 제기했다. 청자의 비밀이 유약에 있다고 보고 ‘동질 칼슘철유설’을 주장했다. 끊임없는 연구 끝에 결국 고려와 조선의 청자, 녹청자, 백자, 분청자, 갈유, 흑유 등은 횟물 유약 속의 철 함량 변화와 칠해지는 두께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중국과 한국의 주류를 이루는 고도자 유약은 같은 것이며 임진왜란을 통해 전해진 일본청자와 백자 또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흘린 땀이 조기정 고유의 청잣빛의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는 1986년 청자기능보유자로 전남 제 10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그 후 광주광역시 제 5호로 새롭게 지정된 바 있으며 전라남도와 광주시 문화재위원으로 활동도 했다. 또 조기정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 7년 동안 강진 고려청자사업소에서 기술담당이사로 근무했다. 고려청자 사업소는 12세기경의 가마자리를 발굴, 보호각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 이곳에서는 고려청자의 근원지답게 고려청자 및 파편을 분석 및 비교하면서 다각적인 면에서 고려청자를 연구하고 청자재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때부터 전남 강진은 전통재래식 장작 가마를 설치해 고려청자의 재현은 물론 강진을 찾는 도자기애호가와 일반인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전남의 관광명소로 잘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렇듯 지금의 고려청자사업소가 성장하기까지 조기정의 역할은 매우 컸다. 당시 그의 요장인 무등요에서 20여명의 도공과 함께 고려청자연구소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는데 뛰어들어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용기와 인내로 지켜온 고려 비색의 열정
고려청자의 비밀을 연구해서 완벽한 수준으로 재현하기까지는 민족의 긍지를 되살리기 위한 조기정의 신념과 열정이 담겨 있다. 오로지 홀로 국내외의 도공들을 찾아다니며 제작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발로 뛰고 머리를 굴린 용기와 인내의 결과다. 그는 전남의 도요촌을 세계적으로 만들겠다는 포부, 목표의식도 뚜렷했다. 항상 숱한 좌절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올곧은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할 것이다.

조기정은 ▶1937년 광주 출생 ▶1957년 법과대학 입학 ▶1967년 무등도요 창건, 토석도자문화연구원 개설 ▶1966~ 개인전 11회(한국, 미국, 일본) 기타 초대전 등 다수 ▶1975년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1979~96년 광주․전남 공예협동조합 이사장 역임 ▶1986년 무형문화재 청자기능보유자 전남제 10호→87년 광주광역시 제 5호, 한국최초 전승자기 문화재 기능보유자 지정 ▶1990년~ 전국무등 미술대전, 전라남도․광주광역시 심사운영위원, 위원장 역임 ▶2002년 (사)남도 문화예술진흥회 회장 ▶2007년 12월 노환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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